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서면서 한국경제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지난 주말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유가는 배럴당 80.50달러로 마감했다. 최근 한 달 사이 무려 25%가 올랐다.배럴당 80달러는 우리정부나 민간연구소 모두 국내경제가 버틸 수 있는 임계점으로 보고있다.
유가가 앞으로 90달러, 100달러대로 계속 오를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지만 국제유가가 급등락을 되풀이하며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어 모두가 예측을 주저하는 분위기다.
유가는 2004년 배럴당 40달러미만이었지만 2008년 7월 147달러27센트까지 치솟았다. 2008년 12월에는 다시 32달러40센트로 급락했다가 지금은 80달러대로 껑충 뛰었다.
이 같은 급등락은 시장의 수요공급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전쟁이나 수출금지조치,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갑작스런 감산 등 극적인 공급쇼크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현재 국제원유시장에 물량부족사태는 없다. 상업재고는 높은 수준이고 정제능력도 원활하다.
수요측면에서 중국과 인도 등 신흥소비대국들의 수입급증이 큰 요인으로 꼽힌다. 중국은 매년 15% 비율로 소비가 꾸준히 늘고 있어 국제유가의 급등락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근본원인은 석유가 더 이상 물리적 상품(physical commodity)에 그치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 통화 등과 함께 국제 금융자산(financial asset)이 되어가고 있는 사정에 있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하루 수십억 배럴(paper barrels)이 원유선물(crude oil futures)로 거래되고 있다. 이 서류상의 페이퍼 배럴 하루 거래량은 실제 하루 세계 석유소비량의 10배 이상이다.
서부텍사스 중질유(WTI)의 경우 원유가 유전에서 오클라호마 주의 카싱 저유탱크로 시속 4마일로 송유관속을 흐르는 동안 글로벌석유시장에서는 빛의 속도로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시시각각 원유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
글로벌 오일게임의 금융플레이어들도 면면이 크게 바뀌었다. 전통적인 석유메이저들은 이제는 뒷전이고 세계 채굴가능 매장량의 80%는 국가소유다. 세계 20대 석유회사 가운데 15개가 국영석유회사다.
거래자들도 연금기금, 기관 머니매니저, 대학기부금운영인, 헤지펀드는 물론이고 개인투자가, 그리고 차익을 노려 하루에도 수십 번 사고파는 데이트레이더 까지 망라한다. 종전에는 석유생산자나 항공사, 난방용 유류 딜러 등 생산자 및 대량소비자 중심의 헤지(위험회피)거래가 주종이었지만 지금은 투기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석유시장이 금융시장과 급속히 통합되면서 시장의 변동성과 가격의 롤러코스트 현상이 심화되어온 것이다. 수요공급 등 시장의 펀더멘탈이나 땅 밑의 채굴가능 매장량 등과는 상관없이 '땅 위의 위험요인들''때문에 유가가 급등락을 거듭하는 형국이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 석유가격의 '파괴적 변동성'(destructive volatility)에 대한 글로벌 해결방안을 촉구하고 나섰다.
2009년 들어 현재까지 국제유가의 평균가격은 배럴당 57달러였다. 대다수 걸프산유국과 러시아는 올해 그들 예산에 유가를 배럴당 65달러로 반영했고 최대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들은 배럴당 75달러가 소비고객들이 감내할 수 있는 적정가격으로 내다보았었다.
유가가 최근 배럴당 80달러대로 뛴 것은 달러약세화, 그리고 경기회복세에 따라 수요가 늘 것으로 내다보고 투기수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석유를 달러화로 사고 팔기 때문에 산유국들은 달러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가격을 올리려든다.
장기적으로 달러가치가 1% 하락하면 유가는 1%이상 오른다는 것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시산이다. 배럴당 80달러가 되어도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그동안 줄어든 구매력 손실을 보전해 주는 것일 뿐 새로운 실익은 없다는 주장이다.
유가가 80달러대를 넘어설 경우 산유국들이 증산할지의 여부는 오는 12월 22일 앙골라의 루안다에서 열리는 OPEC회의가 열쇠를 쥐고 있다. 시장 펀더멘탈를 벗어난 유가의 급등락은 유가전망은 물론이고 석유 및 대체에너지에 대한 투자예측을 갈수록 어렵게 만들고 있다.
최근 세계 거대유전 800여개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석유부존자원은 앞으로 몇 십년동안 수요를 능히 충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06부터 2030년 사이 글로벌에너지사용량이 거의 50%가 증가하고 이 가운데 석유비중은 30%이상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주된 에너지원으로서의 석유의 장래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얘기다.
물론 기후변화협약에 따른 석유소비의 대폭 감축과 탈(脫)석유 대체에너지 기술 개발및 투자가 석유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그러나 수요측면에서 미국과 서유럽 일본 등 선진국들 수요는 이미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이고 수요증가분의 85%가 개발도상국 수요다.
앞으로 적어도 20년간 신흥시장국가들의 경제개발은 왕성할 것으로 예상돼 석유산업은 글로벌성장산업으로 건재할 전망이다.
문제는 석유가 금융자산이 되면서 글로벌 과잉유동성이 석유시장을 지배하고, 수급사정과 무관하게 경제상황과 정치 기술 소비자기호변화 테러 등 각종 사고에 영향 받아 가격이 급등락하면서 '국제유가의 안정'이라는 전제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가 경기전망을 내놓을 때 항상 '국제유가의 안정'을 전제조건으로 내건다. 2010년 예산안에서 국제유가 베이스를 배럴당 63달러로 잡았었다.
앞으로 유가를 어떻게 예측하고, 시나리오를 몇 갈래로 잡아야할 지 경제주체들로서는 실로 난감한 일이다.석유시장의 금융게임 행태와 거래투명성, 그 플레이어들에 대한 규제와 감시의 필요성도 고개를 든다.
그러나 석유시장은 세계 최대의 조직화된 상품시장이어서 규제강화가 제대로 먹혀들지도 의문이다. 유가급등락은 석유시장이 '혼돈의 새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단적인 방증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