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백 호랑이 해'를 맞아 대한민국의 포부가 자못 당차다.
선진화에 고품격, '세계의 선두 달리기'가 새해 벽두의 희망찬 화두(話頭)다.일제강제합병 100주년에 6·25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등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동북아 끝자락에 호랑이처럼 웅크린 대한민국이 호랑이해를 맞아 세계를 향해 포효할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부터 신년메시지를 통해 '선진일류국가로 가는 초석을 확실히 다지겠다'라고 국민에게 다짐했다.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자 주최국이 되었고, 숙원이던 원자력 발전소 수출 길이 열렸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2009년에 자신감을 얻었고, 2010년 우리가 갈 길은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이라고 신년국정연설에서 거듭 역설했다. 더 큰 대한민국은 곧 선진일류국가다.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더불어 '선진화'를 국정의 비전이자 핵심지표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화는 글자그대로 선진국이 되는 일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회여건이 안정적이며, 의식 및 문화수준이 높아 나라의 품격이 있고 다른 나라의 존중을 받는 나라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G20정상회의를 서울에서 주최한다고, 원자력발전소 수출국이 됐다고,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했다고 저절로 선진국이 되고 나라의 품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선진화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복지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일류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선진국은 지구상에서 20개국 정도를 헤아린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30,000달러는 넘어야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지난 100년 동안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일본과 아일랜드 두 나라 밖에 없다.
일인당 국민소득만 높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동의 산유부국들은 소득은 높지만 그들을 선진국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확고해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허용되지만 자유민주주의적 정치과정을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고 법치주의를 통해서만 통치가 가능하다. 모든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수준 높은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다. 높은 문화수준에 자유로운 토론문화가 있고, 갈등을 순화시키는 제도가 잘 갖추어진 나라를 선진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을 선진화시킨다면 그 첫 단계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야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면 정치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고 높은 수준의 문화가 꽃피우기 어렵다. 한국은 1995년에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00달러를 넘어선 이후 여태 20,000달러대에서 턱걸이를 거듭 중이다.
더구나 고령화 저출산화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돼 2019년부터 인구의 14%이상이 노인이 되는 등 성장잠재력은 날로 떨어지는 상황이다. 성장잠재력을 획기적으로 높이지 않으면 선진국이 되기 어렵다.
몇몇 글로벌기업의 성공으로 결과적으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 표현의 자유와 기본인권은 뒷전이어도 돈만 많이 버는 나라, 대학을 취업전초기지로 만들고, 사회적 욕구불만을 법치 아닌 법의 강제로 다스리는 나라는 참다운 선진국일 수가 없다. 그런 '선진화'라면 꼭이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최대의 장벽은 의식의 후진성이다. 물질적으로 압축성장에는 성공했지만 의식이 그에 따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일간지의 신년기획특집에서 조사응답자의 10.9%가 한국이 이미 선진국이라고 답했고 64%가 10년 내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물질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것이다.
선진국 진입에 가장 시급한 과제로 중소기업육성과 복지수준향상을 꼽았다. 그러나 의식 관련은 아예 설문 문항에도 없었다. 지역 및 계층 간 반목과 이념 대결, 여야와 노사 계층 간에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전이 거의 체질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성숙한 세계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정치 때문에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지탄도 쏟아진다. 정치부재는 정치권도 책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주장만 있고 토론은 없는 사회전반의 토론문화부재 때문이다. 다름과 차이에 대한 상호인정, 그리고 가치관의 소통이 되지 않고서는 선진국이 될 수가 없다.
초고속 인터넷강국으로 올라섰지만 네티즌들의 온라인 토론문화는 기성 정치권을 뺨치는 수준이다. 뭐든지 쉽게 불붙고,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어버리는 '냄비근성' 때문에 이성적인 토론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한국인의 역동성은 분명 큰 자산이다. 그러나 그 역동성은 자신의 개성이 묻힌 채 불붙듯 번져나가는 유행에 편승한다. 금모으기와 거리응원문화, '태안의 기적', 부모들의 교육열 등등 한국인 특유의 에너지를 사회자본화 해 선진화의 동력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국가적인 비전이 있어야 한다. 물량적으로 소득 및 수출 세계랭킹 몇 위가 아니고 한국의 문화적 뿌리에서 나오는 독특한 선진화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적 영웅 만들기에 급급해 프로스포츠나 국가대표 간 경기를 민족과 국가의 코드만으로 읽어내고 '대한민국의 희망' '자랑스러운 한국인' 식으로 국가차원으로 환원하는 맹목적 애국심과 국가주의도 지양해야 한다. 인터넷을 통해 속도전을 즐기고, 읽지 않고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미래세대에 고전적 사색을 통해 정신적 삶의 풍요함을 심어주는 교육도 중요하다.
인간의 존재가치를 물질로 채우면 채울수록 상대적 빈곤감은 더해진다. 자살률 최고의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분야가 선진화하면서 통합의 리더십이 구슬 꿰듯 하나로 엮일 때 더 큰 대한민국이 된다.
나라의 품격은 자가발전이나 자화자찬이 아니라 남이 우리를 존경하고 대접해 줄 때 높아진다. G20 정상회의 주최와 관련, 한국인들의 영어능력이 약해 연락업무는 말이 아니고 문서로 시도하는 통에 준비작업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파이낸셜 타임즈 12월 31일자)는 서울주재 외교관들의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는 판이다.
국제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해야 하고 국제매너와 협상에 대한 전략 등도 어려서부터 교육해야 한다. 47조원이란 부풀린 숫자에 들뜨기보다는 원천기술 확보로 원전수출의 내실을 묵묵히 다져나가는 것이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길이다.
외화내빈의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이 아니라 소통과 화합을 이루어 우리사회의 건강성을 증진시키는 일이야말로 더 큰 대한민국을 향한 진정한 첫걸음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