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경영자의 능력과 자질은 기업의 흥망을 좌우한다. 이 때문에 선진국의 초일류기업은
CEO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경영승계플랜을 미리 수립한다.
미국의 한 보험사가 사장 채용공고에서 밝힌 최고경영자의 역할은 명쾌하다. 첫째는 회사
경영 목표의 달성이고 둘째는 이해 관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기 목표 및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며 셋째는 수립된 영업 및 재무 목표의 달성이다.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활발한 근무 분위기 조성, 이사회에의 정보 제공 및 밀접한 업무 관계 수립은 물론 일반대중 언론 감독기관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등의 능력도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필자가 다녔던 한 보험사는 매월 초가 되면 정례조회라 하여 본사 전 직원과 우수 영업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가졌다. 군인 출신의 사장이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그는 틀에 박힌 조회사를 읽어 내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늘 졸리게 마련이다.
하루는 눈이 스르르 감기려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사장이 강조하는 말은 이랬다. "다음으로는 녹음기를 맞이하여 무장공비 침투에 만전을 기할 것이며..."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보험사 조회시간에 무장공비 침투에 만전을 기하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보험 산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헛다리만 짚다가 자기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을 때면 경영진들을 닦달하곤 했다. 그때 등장하는 주 메뉴는 "이 회사는 전쟁 등 비상시에 대비한 대피계획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비상계획관 소관 업무였다. 그러지 않아도 찜통 더위에 기진맥진할 시기에 난데없는 대피훈련으로 짜증이 곱빼기였다.
새 사옥으로 이전할 때는 가까이 있는 직원들을 '멘붕(멘탈 붕괴)'상태로 몰아갔다. 몇 번의 설계변경을 거친 후 가까스로 사장실이 완공되었다. 준공식을 거쳐 드디어 새 건물로 입주했다.
입주 하자마자 총무부장을 불렀다. 던진 첫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이 친구야, 사장 방에는 금고를 갖다 놓아야지, 금고를!", 총무부장은 버럭 호통에 부라부랴 대형 금고를 가져다 놓았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였다. "총무부장 당장 들어오라고 해!" 그는 단순무식한 스타일 그대로 전속부관 다루듯이 소리를 질러 댔다. ' 야! 이 돌대가리 XX야. 금고만 달랑 갖다 놓으면 어떻게 하냐. 돈을 채워 놓아야지, 돈을 !"
총무부장은 비자금으로 금고 채워 놓기 바빴다. 그런데 돈은 채워 넣자마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빠져나갔다.
그는 미국의 보험사가 원하는 최고경영자의 자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경영학자 펠란 박사가 강조하는 CEO의 자질에 대입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비전 공유, 적정한 권한 위양, 해당업계 트렌드 파악, 소비자 욕구 파악 및 해결책 강구 등 5가지의 덕목에 일치하는 부분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 보험사는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적 회사가 되었다. 다른 임직원들이 잘해서 회사가 성장한 건지 어차피 그 당시 보험사 사장은 별다른 역할이 필요 없었던 것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혹시 그가 요즘 유행하는 업무연속성 계획(BCP, Business Continuity Plan)을 미리 주창한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도 한다.
정치권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선거에 공을 세워 국영기업체 사장이나 감사 등으로 내려앉는 '낙하산' 문제는 아직도 이따금 세간을 시끄럽게 만든다. 이들이 제발 '무장공비 잡자'는 식으로 임직원들을 놀라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이유는 왜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