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는 노력 끝에 경북사대부고에 입학한 나는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일약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나 역시 그런 주위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늘 가난 때문에 억눌려 왔던 지난날의 설움이 한 방에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으니까…….
지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는 나를 자신감 가득한 학생으로 만들었고, 입학과 동시에 늘 동경해오던 교복을 입고는 더 큰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우리 가족을 짓누르던 가난의 그늘은 나와 가족의 행복을 오래 지속되게 놔두지 않았다.
중학교와는 달리 고등학교, 그것도 지역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인 경북사대부고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공부에는 그런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원체 똑똑하고 수준 높은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 마음에 부담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중학생 때에 비해 참고서며, 수업 교재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어찌어찌 친구들 것을 좀 빌리기도 하고, 적당히 곁눈질로 옆 친구와 함께 보며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선생님의 꾸지람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루는 반드시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참고서가 있어,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을 찾았다.
아버지는 얼굴과 온몸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당신을 찾아온 나를 참담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아들을 보고 내심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애비가 지금 돈이 어디 있노. 나중에 꼭 만들어 주꾸마,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거래이.”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괜히 와서 아부지를 괴롭혔구나’ 죄송한 마음과 좌절감이 온몸을 마구 두들겼다. 아버지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그대로 터벅터벅 걸으면서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날 밤, 늦게까지 책을 보고 있던 나는 멀리서 아버지가 오는 기척을 느끼고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는 스르륵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내 머리맡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 계셨다.
나는 낮에 참고서 값을 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기만 하던 자식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서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첫 학기 등록금은 아버지 공장의 사장님 도움으로 해결했지만, 문제는 다음 학기부터였다.
담임선생님은 조례시간 때마다 등록금을 미납한 학생들을 호명했다. 처음에 호명됐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열 명 남짓 되었지만,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다.
내가 계속해서 밀린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호출했다.
“조용근, 계속해서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물어도 되겠나?”
“······.”
담임선생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자 담임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 그만 교실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다음 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이곳으로 찾아가 보거라. 너는 성실하고 성적도 좋으니, 충분히 잘 가르칠 수 있을 게다. 이 선생님은 네가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꺾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담임선생님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듯했다. 쪽지를 손에 꼭 쥐고 그 자리에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네가 성공하면 듣겠다.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공부하는 데 모든 정신을 집중하거라.”
“감사합니더. 정말, 감사합니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나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다음 날 담임선생님이 적어준 주소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육군 장성으로 예편한 후 개인 사업을 하는 사장님의 집이었다. 그 사장님 슬하에 있는 자녀 중에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고 있는 꼬마 아이가 하나 있었다.
“자네가 조용근이라는 학생이군. 선생님이 침이 마르도록 자네 칭찬을 하시던데 아무쪼록 우리 아이를 잘 가르쳐 주게나.”
사장은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아들의 개인교습을 부탁했다.
입주 개인교습을 시작하면서 나의 생활은 이전과 백팔십도 달라졌다. 끼니때마다 맛있는 식사가 나왔다. 하지만 비산동에서 하루하루를 배고픔과 싸우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늘 편치 않았다.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면서도 언제나 주일만큼은 교회에서 하루 종일 지냈다. 오전 어른 예배와는 별도로 드리는 오후 중고등부 예배에도 꼭 참석했다. 그리고 틈틈이 선배들과 함께 ‘성화(聖火)’라는 신앙잡지를 만들었다. 편집을 맡고 있던 선배들을 도와서 나는 손으로 먹지에 글자를 쓰고 수제 등사기를 돌려 제본까지 전 과정을 도와주었다. 선배들과 몇 주 동안 작업을 한 끝에 탄생하는 ‘성화(聖火)’가 한 권 한 권 쌓일 때마다 내 신앙의 폭도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온정의 손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의 진정한 사부(師父), 오리궁둥이 걸음을 걷는다 하여 우리 친구들끼리 붙인 별칭 “오리궁둥이 김재복 선생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입주 개인교습 생활은 2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못했다.
내가 가르치던 아이는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나중에 자신이 원하는 중학교에 큰 무리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사장은 다 내 덕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더 이상 그 집에 머물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서울대 상대를 목표로 했지만 실력은 미지수였다. 그런데다가 어려운 가정 형편과 주위 환경이 서울로 가서 공부할 여건이 아니었다. 설령 합격한다 하더라도 입학금과 서울에서 지낼 하숙비를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장 입학시험을 치르러 서울에 올라갈 차비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배짱이 생겼다.
오랜 고심 끝에 집집이 돌아다니며 복조리를 팔기로 결심했다. 복조리를 파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문을 두드리고, 사정을 설명한 후 복조리 하나만 사주십사 부탁을 하면 측은하게 여기기는 해도 3백 원이나 하는 복조리 값을 선뜻 내주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온 동네를 쏘다니며 발품을 팔았지만, 손에 든 것은 별로였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전략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복조리 속에 내 사연을 담아서 무조건 집 안으로 던지고 달아났다. 그렇게 여러 집에 복조리를 던져 놓은 후에, 그 다음 날부터 차례로 한 집씩 찾아가 형편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고학생(?)의 끈질긴 노력에 감탄하여 선뜻 복조리 값 3백 원을 내주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내 손에는 거금 5천 원이 쥐어졌다.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짐을 챙겨 야간열차를 타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대문 앞에 아버지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용근아, 아부지가 돈이 없어 니가 마음고생이 심하구나. 하지만 니가 서울대학교에 떡 하니 붙는다고 해도, 등록금과 하숙비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 기냐. 괜히 니한테 상처만 남을 거 같아 이 애비가 마음이 무겁데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식의 꿈을 꺾어야만 하는 이 애비의 심정을 이해해다오. 이번 일은 그만 포기하는 기 낫겠다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설령 서울대학교에 합격한다고 해도 등록금이며, 하숙비, 생활비 따위를 해결할 돈도, 도와줄 친척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 손에 꼭 쥔 지폐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그저 먼 산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아들의 꺾인 꿈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울고 계시다는 걸······.
먼 산을 쳐다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이대로 내 꿈을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했다. 오직 서울대학교 상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니던가. 그 대신 어느 대학이든 4년간 등록금 한 푼도 내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전면장학생을 뽑는 몇 군데 대학의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할 수 없이, 1년간 재수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하나님께 고하기 위해 어느 날 밤 교회를 찾았다.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는 하나님. 너무도 가난하고 힘든 삶이 저를 억누르고 있지만, 이 삶 가운데 저를 향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참담함이 저를 감싸고 있지만, 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모든 일에 열심히 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눈물을 흘리는 건 오늘뿐이다. 더 이상은 아무리 큰 시련이 나를 덮친다 해도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앞으로 내가 흘리는 눈물은 오직 기쁨의 눈물뿐이다.’
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패배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내 삶은 반드시 빛날 것이라는 확신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또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과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2년간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건강을 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날 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열매를 맺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