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을 치른 주요 3당의 선거프레임은 '심판'이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국정에 발목 잡는 야당을,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여당의 경제실패를, 국민의당은 거대양당이 기득권화 된 낡은 정치를 각각 심판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총선결과는 집권여당 새누리당의 참패였다. 새누리당은 과반붕괴를 넘어 아예 제2당으로 전락했다. 집권에 성공한 제1당이 현직 대통령의 임기 중 제2당으로 추락한 일은 유례가 없다. 두 야당은 마음만 먹으면 자기들끼리 상의해 입법권과 예산처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선거의 여왕'으로 과거 전국 단위 선거에서 '불패 신화'를 이어왔던 '정치인 박근혜'에게 이 이상의 수모도 없다.
총선 하루 전 박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까지 19대 국회의 행태를 비판하며 국민을 향해 국회 및 야당 심판을 호소했다. 집권 여당이 과반 붕괴에 그치지 않고 원내 1당 자리를 제1 야당에 내주기까지 한 것은 새누리당 심판을 넘어 박 대통령 자신에 대한 민심의 호된 심판으로 읽혀진다. 심판을 외치다 스스로 호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새누리당의 막장 공천극이 직접적 요인이지만 이 또한 박 대통령 자신의 공천 개입으로 빚어진 일이다. 집권 초부터 계속돼 온 대통령의 독선과 불통, 대통령만 쳐다보며 국민은 안중에도 없던 집권여당의 오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아닐 수 없다. 콘크리트 지지층을 형성했던 상당수 보수세력까지 등을 돌려 '정치적 탄핵'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16년 만의 여소야대 국회로 의회 권력은 야당으로 넘어갔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의석을 합하면 과반을 훌쩍 넘는 167석이나 된다. 이들 야당의 협조 없이는 어떠한 법안 처리도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쟁점법안 처리 등 국정과제를 뒷받침할 국회의 협력이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 1년 10개월 동안 더욱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오히려 야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그토록 비난해 온 국회 선진화법에 매달려야 할 처지가 됐다.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려던 4대부문 개혁과 각종 경제활성화 정책들도 줄줄이 무산될 처지다. 레임덕(권력누수)의 가속화가 내다보인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박 대통령의 말대로 안보와 경제의 동시 위기다. 체제가 불안한 북한은 핵 위협 등으로 공세 수위를 높여 가고 동북아 정세는 요동친다.
심각해지는 양극화와 저출산, 수출 급감, 최악의 청년실업 등으로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은 따갑다. 새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경제체질을 바꾸는 구조개혁이 시급하다.
국민여론을 등에 업고 국회를 비판하는 기존 방식으로 법안처리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당·청 관계를 비롯한 대야, 대국회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으로 내몰리고 있다.
집요한 승부사인 박 대통령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깜짝카드로 상황을 반전시켜왔다. 17대 총선에선 천막 당사 설치로, 18대 총선에선 대구 칩거로, 19대 총선에선 경제민주화 이슈 선점 등 깜짝 변신으로 선거 판세를 뒤집었다.
세종시 이전 논란 때는 국회본회의장에 연설자로 직접 나서 여론몰이를 주도했고, 2007년 대선후보경선 패배 때는 미소까지 지으며 깨끗이 승복해 차기(次期)를 예약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돈다. 조기 레임덕 차단을 위한 사정정국 조성, 특히 선거사범 처리를 신속 강력하게 진행시켜 야당의 승리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 시도, 당․정․청 인적쇄신을 통한 국면전환을 노려 볼 수도 있다. 제3당인 국민의당과 연립정부 구성이나 정책 연대 등의 형태로 손을 잡거나, 총선결과 무주공산이 된 새누리당 대선후보 레이스에 안철수 대표를 끌어들이는 방안 등도 청와대 및 안 대표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능한 시나리오로 오르내린다. 하지만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20대 국회를 여소야대로 만든 국민의 표심을 거슬리는 것이어서 더 큰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국면 전환을 위한 임기응변이나 정치공학적 접근보다는 이번 총선에서 표출된 민의의 질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국정운영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다. 야당과의 대화를 늘려가면서 3당 구도를 활용해 협치를 통해 돌파구를 찾는 일이 가장 현실적이다.
4․13총선의 민의는 협치를 위한 절묘한 구도를 만들어 3당에 안겼다. 대통령의 새누리당을 호되게 심판하면서 더민주에게 새누리보다 단 1석 많은 의석을 안겼다. 호남텃밭에 안주하며 대안 없이 반대만 일삼는 더민주당을 호되게 심판하면서 제3당 국민의당에게 더민주 보다 1.4%포인트 많은 정당득표율을 안겨 절묘한 3당 구도를 연출해냈다.
3당구도하에서도 이견이 큰 쟁점법안은 19대 국회와 마찬가지로 새누리와 더민주 양대 정당이 합의를 보아야 통과가 가능하다. 쟁점 법안 처리를 위해서는 국회의원 5분의 3 이상 동의를 얻도록 한 국회선진화법 조항 때문이다.
20대 국회 의석 분포 상 새누리가 국민의당(38석), 친여 무소속(7석)과 연대를 가정해도 최대 167석, 더민주가 국민의당과 정의당(6석), 친야 무소속(4석)과 연대해도 최대 171석, 모두 180석에 미달되기 때문에 협치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여소야대와 3당 체제에 걸맞게 우선 대통령의 소통방식부터 달라져야한다. 여당은 물론 야당과도 수시로 만나 수시로 설명하고 수시로 협의하는 '설득의 정치'를 본격 가동해야 한다. 김종인 문재인 안철수 등 야권 지도자들과도 필요하면 직접 대면하고 소통할 필요가 있다.
3당 체제를 잘만 활용하면 대통령에게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수권정당의 면모를 보여야하는 더민주나 국민의당이 박근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정략적 공세로 일관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이 진정성을 갖고 다가가면 야당도 사안에 따라 협조할 수밖에 없다. 경제활성화 법안이나 노동개혁법안도 대안을 만들어 통과시킬 수도 있다.
문제는 협치를 위한 대통령의 열린 자세다. 때마침 한국정치학회 소속 교수 10명이 협치를 위한 모델로 대통령과 여야대표간의 회동 정례화, 청와대에 야당과의 대화창구 설치, 야당의 대안제시 의무화, 제3당의 제1, 2당 중재 및 타협, 국회상임위에 권한 부여를 통한 문제해결 등 5가지를 협치의 틀로 제시했다.
새누리당 참패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박 대통령 본인이다. 뼈아픈 반성과 함께 소통과 설득, 양보와 타협으로 협치의 꽃을 피우는 일이야말로 레임덕을 막고 한국정치의 업그레이드로 총선 민의에 보답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