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일보

검색

글자 크기조절

글자 크기가 적당하신가요?

[홍재화의 무역이야기]

한반도 중심 동아시아 무역 역사

조세일보 / 홍재화 필맥스 대표 | 2019.08.21 10:45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고대-고려-조선-근대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중국, 일본 등의 여러 나라와 활발한 교역 또는 무역을 행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무역상대국은 서양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또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부터는 무역의 관건이 되는 해상운송에 종사하는 자나 어부들은 천민으로 취급받았다.

더욱이 상류층이나 다른 생계수단을 가진 자들은 이 분야에 진출하지 않아 한국의 무역은 위축되었으며, 결국 대원군의 쇄국주의로 현대문명으로의 개화가 그만큼 늦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무역의 발전사는 자기 영토 내에서의 산물로 만족하지 않고 자국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나라와 서로 교역하여 살아갔을 때가 더 부강했던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자국 영토 내에 부존자원이 빈곤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외국과의 교역이란 곧 생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타국과의 무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활발하게 시작한 것은 남북국시대 신라인들이었다. 당시 신라의 항해술, 조선술 등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월등하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기의 이와 같은 해상무역의 성행은 한국 전근대사를 통틀어 매우 특이한 양상이며 또한 정치세력의 변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유럽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상과 육상을 통한 중세의 세계무역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로서 발해와 신라도 세계 무역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공식적으로 주고 받는 조공품과 하사품 외에 이를 계기로 이루어지는 사무역 비중도 높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신라시대 당나라와 일본간의 중계무역을 전문으로 한 장보고를 들 수 있다. 조선 역시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서도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한국사에서 무역은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나뉘는데 주로 조공을 매개로 한 공무역 즉 조공 무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조공(朝貢)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던 행위 또는 그 예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주변 국가의 왕에게 직책을 내려주는 '책봉(冊封)'과 하사품으로 답례를 하였다. 답례품을 '회사(回賜)'라고 했다. 답례로 하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주변 국가들과 조공과 책봉이 시작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은 것은 당나라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명·청 시기까지 중국과 주변국의 조공·책봉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조공과 회사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무역 형식이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원이 가장 풍부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은 중국 상품과 교환하기 위해 자국 물자를 가지고 중국에 간 것이다. 대개의 경우 대국임을 자처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받은 것 이상으로 답례하는 것이 자국의 국제적 체면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무역적자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적자 무역을 중국이 한 이유는 이민족의 침략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이다. 주변 국가들 입장에서 볼 때 늘 이익이 나는 조공이라는 형식의 무역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조공형식의 무역은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국가 간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결국 19세기 이전 만주·몽고·서장(西藏)·안남(安南)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 나라는 모두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간에 존재했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공과 책봉만을 두고 종주국에 대한 예속 또는 종속이라고 볼 수는 없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을 할 때조차 형식적으로는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조공형태의 공무역이 중국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송나라 말기에는 고려에 보내는 사절을 요에게 사용하던 국신사(國信使)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송·요·금 등의 나라에서는 고려 국왕이나 태후의 생일을 비롯해 다양한 명목의 사신들이 왔다.

이런 점들은 전통적인 조공질서에서 천자의 나라가 제후 또는 조공국가에 대해 하던 의례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려는 조공제도의 이상을 표명하면서도 실제로 국가의 존립을 위한 실리적인 정책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는 결코 모범적인조공국(Model Tributary)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거꾸로 고려가 여진의 조공을 받는 형식을 취하였으며, 그 밖에 일본·송 상인·아라비아 상인의 고려에 대한 무역도 형식상 여진과의 관계에 준하여 시행되었다. 고려가 종주국으로서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외교관계는 대체로 여진에서 고려를 찾아오는 일방적인 것이었고, 그 주요한 목적은 고려와의 물품 교환이었다.

조선의 경제정책은 건국 초기에 내세운'중농억상(重農抑商)'의 이념적 기조를 바탕으로 펼쳐졌다. 따라서 조선시대 상업 활동을 통한 자본의 집적과 경제변동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조선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은무역(SilverTrade) 중간매개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청)중국물화↔(조선)인삼·잡화와 중국물화↔(일본)왜은이 교환되는 무역구도를 형성해 나간 것이다.

17세기후반 청·일 간 직교역의 영향으로 중개무역이 쇠퇴했다. 그러나 국제무역으로 성장한 조선 상인들은 사무역을 통해 무역이익을 축적하며 책문무역과 왜관무역을 주도해 나갔다. 조선정부도 무역상의 이익을 세금으로 전환하여 재정 보충의 방법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조선 후기 대청무역은 전 시기를 걸쳐 국내 상업세력의 성장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19세기에도 특권 상인이었던 역관·서울상인 위주로 무역정책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 결과 폭넓은 사상층을 비합법적인 상인의 범주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무역세 수취를 통한 국가재정 확보를 뒤로 돌리는 한계를 노출했다. 조선의 대청무역이 국내 상업계와 산업부문에 침투하여 경제변동을 이끌어내지 못한 원인은 결국 조선정부의 대청무역정책의 폐쇄성에서 찾아진다고 하겠다. 이후 한국의 경제는 일제 침탈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한동안 깊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한국은 수출진흥을 중심으로 하는 외향적 발전전략을 실행하면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제 성장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이후 한국의 성장정책을 따라하며 본받고자 하였으나, 아직까지 한국과 비슷한 정도의 성장을 한 국가는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부분에서 자세히 하고자 한다.  홍재화 필맥스 대표


홍재화 필맥스 대표

[약력] 중앙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전 KOTRA 파나마무역관, 홍보부 근무
[저서] 무역&오퍼상 무작정 따라하기, 수출 더 이상 어렵지 않아요, 어제를 바꿀 순 없어도 내일은 바꿀 순 있다, 해외무역 첫 걸음 당신도 수출 쉽게 할 수 있다 등 다수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drimtru
[저작권자 ⓒ 조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화끈한 토픽·쏠솔한 정보 조세일보 페이스북 초대합니다.

관련기사

Copyright ⓒ Joseilbo.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