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전문가 단체 '파워게임'…무참히 패한 정부
국회 법률안 계류 결정-"사실상 폐지 수순"
고소득 현금수입업종의 세무신고 내용을 사전에 검증하고, 탈세를 차단하겠다는 취지로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한 '세무검증제도' 도입이 사실상 무산됐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부는 '파워게임'에서 철저하게 패퇴한 꼴이 됐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6일 저녁 조세소위원회를 열고 세무검증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기획재정부의 소득세법 개정안을 수용하지 않고 계류키로 합의했다.
표면적으로 '계류'지만 사실상 폐지 절차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
현금수입업종에 대한 과세양성화라는 입법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방법론에서 정부가 제시한 '세무검증'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소위원들이 정리해 내린 결론이다.
전체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조세소위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는 점에서 세무검증제도는 수 개월 동안 논란을 뒤로하고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됐다.
□ 변협·의협 "사필귀정…도입무산 '대환영'"= 세무검증제 도입 무산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동안 이를 지속적으로 반대해 왔던 변호사협회와 의사협회는 환영 분위기다. 나름의 논리로 맞서던 기획재정부는 반대로 체면을 구겼다.
재정부 세제실 관계자는 "아직 최종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 아니다"라며 소위원들의 논의결과에 무게를 두지 않으면서도 "필요하다면 개선된 안을 마련해서 내년에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년에 논의가 재개될 지는 불투명하다.
고소득 현금수입업종으로 세무검증의 타깃이 됐던 의사 및 변호사업계에서는 환영의 뜻을 숨기지 않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 이미현 부협회장은 "결론에 환영한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라며 "내야할 세금은 당연히 내야하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무리한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대한의사협회 장현재 이사는 "정부에서 제도 도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자연스럽게 세금을 잘 낼 수 있는 제도개선으로 가야지, 강력한 법을 통해서 그것도 특정집단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은 모순이었다"고 지적했다.
검증대상이자 주체로서 검증에 대한 책임까지 지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세무사측에서도 제도 도입 무산을 은근히(?) 환영하는 모습.
한국세무사회 관계자는 "상임이사회에서 입장을 정리해봐야겠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제도도입 무산은)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 세무검증제 뭐가 문제였나= 정부가 마련한 세무검증제도에 대한 기획재정위원들의 반응은 '세원양성화'라는 입법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세무검증'이라는 방법론에서는 문제가 많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민주당 이용섭 의원은 세무검증제도에 대해 "아무리 목표가 좋아도 뒷받침하는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면 나쁜 정책"이라고 평가했고, 한나라당 권경석 의원은 "국가 과세권의 일부를 민간에 위탁하면서 세정체계의 혼란과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정부가 도입을 추진한 세무검증제도는 일정소득금액 이상의 현금수입업종 사업자가 종합소득세를 신고할 경우 세무사 등에게 장부기장 내용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 받고, 그 검증확인서를 국세청에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
검증확인서를 제출하지 않는 사업자에게는 가산세를, 검증을 부실하게 한 세무사에게는 징계 철퇴를 가해 성실도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계획도 담겨 있었다. 현금수입업종의 탈세를 차단하고 국세청의 세무조사 인력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일부 세무사들의 탈세조장도 막는다는 논거가 뒷받침됐다.
그러나 국회 논의를 거듭할수록 제기되는 문제는 늘어만 갔다.
부실검증에 대한 제재방법이나 검증 실효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쏟아졌다.
기획재정위 전문위원실이 정리한 세무검증제에 대한 조세소위 논의요지에 따르면, 세무대리인에게 세무대리인을 검증하도록 하는 경우 본인이 본인을 검증한다는 이론상의 문제는 정부가 마련한 제도의 가장 큰 흠결 중의 하나로 꼽혔다.
정부안에는 세무대리인과 검증대리인을 별도로 선임하도록 요구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다가 세무사는 세무검증주체이자 세무검증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럴 경우 본인이 대리인이 되는 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교차검증'이나 본인검증을 배제하는 수정안도 제시됐지만, 이번엔 부실검증 세무사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부각됐다.
정부안에는 세무사의 직무에 '세무검증'을 추가할 뿐, 부실검증에 관한 구체적인 징계사유를 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
현행 세무사법은 세무사의 징계사유로 비밀엄수, 성실의무, 탈세상담금지 등 세무사법 위반한 경우를 두고 있는데, 부실검증은 이 중 '성실의무 위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낮은 세무사 징계현황을 감안하면, 세무검증에 대한 성실의무위반으로는 사실상 징계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납세자가 부담하는 세무검증비용을 세액공제를 통해 덜어주는 문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했다.
세액공제율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 합의점을 찾기 어렵고, 기장대리비용을 검증대리비용에 전가하는 편법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세무공무원이 아닌 민간에게 일종의 확인이나 검증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도 의원들의 지적이 쏟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세무검증을 성실히 이행한 경우 제공되는 '무작위추출방식의 세무조사대상 선정 제외'라는 혜택도, 특정 사업자를 제외함으로써 '무작위추출방식 선정제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