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자유무역협정) 선진국' 한국이 영어에 발목을 잡혔다.
한국·유럽연합(EU) FTA 비준동의안이 오역(誤譯)논란에 휘말려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부결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통상교섭본부가 번역한 1200여 쪽 짜리 한·EU FTA협정문 한글본에서만 207군데 오역이 발견돼 국무회의를 세 번 거치고, 국회에도 세 번째 제출되는 소동을 겪은 것이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이렇게 넘어온 비준동의안을 표결로 밀어붙이려다 '물리력에 의한 의사진행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홍정욱 한나라당 의원의 기권으로 과반(過半)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홍 의원은 "정부는 번역오류로 국민이 납득하기 힘든 잘못을 범했다. 야당과 충분한 토론과 협의 없이 정부가 주장한 긴박성만으로 의결해서는 안된다"며 "FTA 비준보다 더 중요한 국익은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한·EU FTA 비준동의안은 지난 2월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돼 오는 7월 1일 잠정 발효를 위한 EU 측 내부 절차는 모두 마무리됐다. 남은 것은 국내 비준 절차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25일 국회에 한·EU FTA 비준 동의안을 제출한 뒤 세 차례 공청회를 열었다. 정부 여당은 상대적으로 논란이 더 큰 한·미 FTA에 앞서 한·EU FTA 동의안을 먼저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4월 임시국회 중 비준동의안 국회 처리를 완결짓고 6월까지 잠정발효에 필요한 우리 측 내부절차와 관련된 법률개정작업을 끝낸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번역오류와 협정의 한영본 불일치가 속속 드러나면서 협정 비준안 철회와 함께 협상결과에 대한 철저한 검증요구가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에서 쏟아지고 있다. 오역은 한·EU 뿐 아니라 한·미 FTA협정문에서도 발견돼 통상교섭본부가 검독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국은 지난 8년간 45개국과 FTA를 체결했다. 미국 및 EU와는 각각 FTA를 체결한 유일한 나라로 세계적 'FTA 허브'를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 FTA'의 양대 축(軸)인 한·미와 한·EU 협정문에서 오역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내외적으로 체면을 구겼다.
오역은 단순한 '오타'(誤打)나 생략, 의역(意譯)의 수준을 넘어 내용상 중대한 하자도 적잖게 발견됐고 국가 간 협정문에서의 이 같은 오역소동은 외신에 웃음거리 '해외토픽'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G20(주요20개국) 서울정상회의 개최로 우쭐해 진 한국정부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교통상부 직원들은 한꺼번에 3-4개 협상을 진행하며 수천 쪽의 협정문 번역에도 매달려야했고, 번역 후 검독은 예산을 아끼려고 무급(無給) 인턴에게 맡긴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EU는 공식 문서에 대한 검독을 전담하는 부서를 두고 있다지만 우리 정부에는 검독전담 공무원조차 없다고 한다. 원산지증명, 특허, 불공정거래행위, 면책조항 등 부문별 전문분야는 해당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전문용어부터 정확히 번역했어야 했다.
외교통상부는 당초 협정문의 어느 한 쪽에서 오타 오역으로 인한 정정작업은 국가 간 협정체결 및 발효과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적절한 정정을 가한 후 체결당사국 끼리 공한을 보내면 된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미 FTA 협정문에서도 오역 문제가 속속 드러나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정부와 법무법인, 관세법인, 국민의견수렴 등 4단계를 거쳐 철저히 재검독하겠다"며 "국민적 우려가 크고 (오역에 따른) 죄질이 크다고 판단되면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FTA 협정문 번역오류는 한마디로 동시다발 FTA 추진전략에 따른 지나친 속도주의가 빚은 산물이다. FTA 체결은 많으면 많을수록, 또 시기가 빠를수록 좋으며 그것이 곧 한국의 '경제영토 확장' 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FTA '신화'(Myth)에 홀린 결과다.
경쟁상대국들보다 한 발 먼저 FTA 체결을 서두르는 전략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FTA는 체결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EU FTA는 2009년 10월에 가서명됐다. 그러나 여태 발효가 안 되고 있고, 한·미 FTA는 발효가 3년 이상 늦춰지고 있다.
발효의 열쇠는 국내비준이 쥐고 있다. FTA는 대외협상 못지않게 대내협상이 중요하다는 말도 이 때문이다.
FTA가 아무리 중요해도 절차와 과정이 인정받지 못하면 국민을 설득할 수가 없다. "오역은 착오를 바로잡는 '정정'수준이다. 인도 일본 등도 EU와의 FTA 체결을 서두르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늦출 수는 없다"며 마냥 밀어붙일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미 FTA보다 한결 수월할 것으로 보였던 한·EU FTA가 협정문 번역오류로 발목이 잡힌 것은 너무 서두르다 일을 그르친 정부의 자업자득이다. 한·미 FTA의 조기비준을 요구해온 미국정부 입장도 따라서 곤혹해졌다. 지난 주말 방한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의 핵보다 FTA 조기비준을 누누히 강조하고 갔다.
한·미 FTA 번역 오류에 대해서는 현재 재검독 작업이 진행 중이며 정부 FTA 홈페이지(www.fta.go.kr)에 지난 2007년 서명된 협정문과 올해 2월 추가 협상된 합의문을 올려 국민의견을 듣는 절차를 밟고 있다.
번역오류가 심각할 경우 이미 외통위를 통과한 협정비준안을 정부가 자진 철회해 수정한 뒤 다시 제출하는 한·EU FTA 전철을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무슨 낭비인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외교는 큰 줄기 못지않게 작은 것들의 세세함(details)이 중요하다. 선진일류 한국을 자처하기에 앞서 국제협상력과 원활한 언어소통능력부터 갖춰야한다. 온 국민을 영어몰입교육에 몰아넣지 말고 영어가 필요한 부문에 확실한 전문 인력을 집중 공급하는 국가적 프로그램을 갖춰야 한다.
정부는 번역오류 재발 방지를 위해 법률 검토와 번역을 전담할 상설조직을 신설하고, 외부 전문기관과 일반국민이 검토할 수 있는 번역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한다.
정부 여당은 '번역 오류 때문에 비준동의안 처리가 늦어진다면 중대한 실수를 하는 것'이라며 국회의 조속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여야는 이달 중 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고 하지만 협정문 오류수정에다 축산농가피해대책 등 과제는 만만치 않다.
한·EU FTA에 이어 한·미 FTA 등 '비준고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서두른다고,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늦더라도 바르게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