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돈이 너무 없다. 하지만 돈 써야 할 데는 더 많아지고, 벌어들일 소득은 얼마가 될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돈이 부족할 거 같은데..."
우리경제의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가계부채 때문에 시름하는 일반 가정주부들이 가계부를 써내려가며 고민하는 문제가 아니다. 5000만 대한민국 국민들의 경제를 책임질 박근혜 정부가 앞으로 5년 동안 나라살림을 이끌어갈 계획을 담아 발표한 '공약가계부'에 대한 우려다.
정부는 31일 서울시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정홍원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하고, 총 134조8000억원 규모의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 이행을 위한 재정지원 실천계획(공약가계부)'을 발표했다.
4대 국정기조를 중심으로 총 140개 국정과제를 선정해 ▲경제부흥 33조9000억원(25%) ▲국민행복 79조3000억원(59%) ▲문화융성 6조7000억원(5%) ▲평화통일 기반구축 17조6000억원(13%) 등에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이번 공약가계부는 역대 정부 최초로 작성돼 국민들에게 공개된 공약이행 실천계획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정부의 140개 국정과제는 물론 지난해 3월 새누리당이 내놓은 4·11 총선공약,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 등도 대부분 담겨있다.
그동안 정부가 내세웠던 공약을 책임있게 실현, 국민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의지다. 저소득·서민층을 위한 복지지원을 확대하고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마련된 공약가계부가 제대로 실천된다면 국민들의 삶은 한층 나아질 전망이다.
하지만 공약실천에 필요한 '실탄'을 어떻게, 과연 얼마나 마련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아무리 국민행복과 경제부흥을 위해 적재적소에 예산을 투입할 계획을 세우더라도,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데 실패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 박근혜 정부, 출범부터 적자…"세입부족으로 17.3조원 추경 편성" = 이미 박근혜 정부는 지난달 17조3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 예산안을 편성했다. 추경 재원 중 약 15조7000억원은 고스란히 '나라빚'으로 잡히는 국채를 발행해 조달할 계획이다.
지난 7일 국회를 통과한 최종 추경 예산안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추경 편성으로 인해 2012년 445조2000억원에서 올해 480조3000억원으로 35조원 이상 증가한다. GDP 대비 국가채무도 34.8%에서 36.2%로 상승한다.
17조원 이상의 추경 예산을 편성한 가장 큰 이유는 장기화되는 경기침체의 여파로 올해에만 12조원 가량의 세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미 올해 경제성장률을 당초 3.0%에서 2.3%로 하향조정 함에 따라 6조원 가량의 국세 수입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고, 산업은행·기업은행 지분매각 지연 등으로 약 6조원의 세외수입이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내년이다.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세수확보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국세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법인세와 소득세 수입의 경우 전년도 경제성장률에 큰 영향을 받는 점을 고려하면, 성장률 하락이 예상되는 올해 경제상황을 볼 때 내년에도 세입결손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 가시밭길, '비과세·감면' 축소…"박근혜 정부는 다를까?" = 이와 같은 세수부족 상항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134조8000억원의 국정과제 이행재원 중 36%에 달하는 48조원을 국세수입으로 조달할 방침이다.
국민들의 추가적인 세부담을 늘리지 않기 위해 세율인상·세목신설 등 직접적인 증세도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정부는 비과세·감면 정비로 18조원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12.8%에 달하는 국세감면율을 지속적으로 줄이기로 했다. 일몰이 도래한 비과세·감면은 원칙적으로 종료하겠다는 의지다.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그동안 대부분의 역대 정권에서도 출범 초기 강력한 비과세·감면 축소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비과세·감면 정비는 항상 실패의 역사를 거듭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얽히고 설킨 비과세·감면 제도를 단번에 축소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 세제혜택이 줄어들 경우 그동안 내지 않았던 세금을 납부하는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납세자들의 조세저항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그동안 정부가 추진했던 비과세·감면 축소 방안은 표심을 의식한 국회의 반대로 무산된 경우가 허다했다. 지난해에도 정부가 농·수·신협, 산림조합, 새마을금고 등 조합법인 예탁금과 출자금에 적용되던 비과세 혜택을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결국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조세전문가들도 증세에 앞서 비과세·감면 축소를 추진해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에는 동감하지만, 계획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비과세·감면 정비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문제"라며 "정부가 중산층·서민층에 대해서는 손을 안 댄다고 했지만 정책적인 혜택에 대한 효과가 있었는지, 성과는 나왔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창남 강남대학교 세무학과 교수도 "비과세·감면 제도는 조문 하나하나가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국회에서 동의되고 통과된 사안"이라며 "이는 각 조문 하나하나 마다 이해관계자가 명확하게 구성돼 있다는 소리로, 이들의 결사반대와 조세저항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밝혔다.
반면 정부는 5년 동안 18조원 가량의 비과세·감면을 축소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김낙회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은 "지난 2개월 동안 비과세·감면의 전체 항목을 다시 살펴봤다"며 "투자·고용·연구개발·근로자·중소기업·기타분야 등을 중심으로 축소 가능한 부분을 계산해 보니 18조원 가량이 나왔고, 일몰이 도래하면 원칙적으로 정비하겠다는 전제로 세수계획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 지하경제 양성화 '아킬레스 건'…"세금 부과해도 징수되지 않는다" = 정부는 국세청, 관세청 등 과세관청의 세무행정을 한층 강화, 현재 GDP의 17.1%에 달하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27조2000억원을 확보할 계획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탈세규모 및 탈루혐의가 큰 대기업, 대재산가, 고소득 자영업자, 밀수, 역외탈세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세무조사를 한층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지하경제 양성화 대책이 곧바로 세수확보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세무조사 이후 상당한 세금을 추징 당하게될 대기업, 고소득자 등의 경우 대부분 조세심판원 등에 조세불복 심판청구를 신청, 실제 세금을 징수할 때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매년 급증하는 심판청구 건수로 인해 이미 '과부하' 상태인 조세심판원의 실정도 감안해야 한다. 심판원의 경우 지난해에도 총 6444건의 심판청구를 처리했지만, 직원 수는 100여명에 불과하다.
앞으로 본격적인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 추진으로 납세자들의 조세불복이 늘어날 경우 심판원의 업무과다는 더욱 심각해지고, 심판청구 1건당 90일로 정해진 법정처리기한을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심판원에서 과세관청의 손을 들어 주더라도, 납세자들은 법원으로 소송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국세청 등에서 세금을 부과하더라도 수 년 간에 걸친 법정다툼 끝에나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소송에서 패할 경우 세수는 고사하고 상당한 징세비용만 허비할 수 있다.
다만 정부는 이와 같은 납세자들의 조세불복을 감안하더라도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5년간 27조2000억원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낙회 세제실장은 "지하경제 양성화의 경우 납세자들의 조세불복이 예상되지만, 국세청 등에서 이와 같은 사항을 감안했다"며 "국세청 등 과세관청에서 27조2000억원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획을 고려해 계산한 목표"라고 말했다.
반면 조세전문가들은 정부가 현재와 같은 경기침체 상황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를 추진하더라도 목표한 세수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지하경제 양성화와 비과세·감면 축소가 주로 대기업을 타깃으로 시행될 경우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 세부담을 전가시킬 가능성도 크다고 우려했다.
홍기용 한국납세자연합회 회장(인천대 세무회계학과 교수)은 "지하경제 양성화가 증세와 다르다고 하지만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가는 것은 같다"며 "경제가 어려우면 지하경제 규모도 줄어들 수밖에 없어, 정부 계획만큼 세수확보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일시적으로 세수가 늘어날 수는 있지만 지하경제 양성화로 5년 동안 충분한 재원을 마련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비과세·감면 축소는 주로 대기업의 세부담을 늘리게 되는데,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에게 세부담을 전가시킬 우려도 크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