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김영기 국세청 조사국장(사진)의 갑작스런 사표제출 소식이 <조세일보>에 보도되자 전화기에 불이 났다. "정말이냐?"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주였다.
2만여 국세청 공무원중에서 '김영기'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선 그의 세무대학 후배 숫자만 5천명에 이른다. 비고시출신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국세청 조사국장이란 요직중의 요직에 오른 그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퇴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관리자들의 눈가엔 이슬이 촉촉히 맺히고 음성은 나지막이 떨렸다.
30년이 넘는 세월, 국세청을 굳건히 받쳐 온 '거목(巨木)'의 퇴장 소식은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김영기' 이름 앞에는 '국세행정의 달인', '세무조사 전문가', 와 같은 업무와 관련한 수식어부터 시작해 '세무대학 출신 선두주자' 등 무수한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같은 수식어들을 한층 빛내 주는 또 다른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국세청 최고의 일꾼'
그런 그가 30여년 국세공무원 생활을 접고 6일 오전 11시 퇴임식을 갖고 정든 국세청을 떠난다.
그는 사직서을 제출한 뒤 집무실에서 이렇게 밝혔다.
"왜 아쉬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떠날 때가 되면 미련없이 떠나야 한다고 배웠다. 모두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고맙고 또 감사하다."
요새 표현으로 쿨(Cool)하게 돌아선 그의 뒷모습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가난을 이겨낸 '의지의 한국인'
1956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김 국장은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호구지책을 위해 초등학교 소사, 철공소 등에서 일했다.
못다한 공부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 자격을 땄다. 이후 이런 저런 일터에서 생계로 땀을 흘리던 김 국장은 우연히 세무대학교 신입생 모집공고를 보게 됐고 이 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세무대학 초대 입학생 김영기. 그는 동기들보다 네다섯살이나 많은 나이였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83년 200여명의 동기들과 함께 국세청에 입문했다.
일선 세무서 근무를 통해 국세행정의 기본수업을 받은 김 국장은 짧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세제실 근무를 거쳐 국세청 본청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세무대학 맏형답게 업무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면서 앞장 서 나갔다.
업무 능력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도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여 '세무대학 선두주자'로 성큼 뛰어올랐다.
동기들 중 사무관으로 가장 먼저 승진하여 울산세무서 법인세과장, 중부세무서 직세과장, 서울국세청 조사국을 거쳐 국세청 초대 직원고충담당관으로 발탁됐다. 젊은 시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봤기에 당시의 경험을 밑바탕 삼아 고된 일상에 힘들어 하는 직원들의 고충해소와 복지증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2003년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서기관으로 승진, 복수직 서기관들의 선망의 대상인 제주세무서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국세청은 제주세무서장 부임 6개월만에 그를 불러들여 국제세원정보T/F팀장에 임명했다. 이후 조사국의 주요업무를 맡았다.
조직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이후 부천세무서장과 국세청 통계기획팀장을 거쳐 납세자보호과장에 부임, 당시 국세청 최대 프로젝트였던 '국세청 신뢰도 평가 및 제고' 전면에 투입되기도 했다. 신뢰도 평가와 관련해 괄목할 성과를 올린 그는 국세청 과장급 최고의 요직인 법인세과장을 거쳐 일약 운영지원과장에 발탁됐다.
2009년 10월 세무대학 출신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부이사관(3급)으로 올라섰고 2010년 고위공무원 반열에 올라선 뒤 중부국세청 조사1국장, 서울국세청 조사1국장, 국세청 자산과세국장을 거쳐 2013년 4월 국세청 최고의 요직인 조사국장에 올라섰다.
이후 차기 1급 승진 '1순위'라는 평가와 수 많은 세무대학 출신 후배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고 2013년 12월 26일 고심 끝에 후배들에게 승진길을 열어주기 위해 용단을 내렸다.
그의 사직서 제출을 국세청 간부들이 적극 만류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국세청 최고의 일꾼, 무거운 짐을 벗다.
김 국장은 업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획력과 추진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의 전공인 세무조사는 물론, 국세행정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다.
대인관계도 폭넓고 유연했다. 국세청 직원들이 닮고 싶어하는 관리자로 2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2010년, 2011년).
청렴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한 토막.
23개 중앙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진행되던 2001년. 당시 서울국세청 조사국 조사팀장(사무관)으로 한 언론사 세무조사에 투입됐던 그의 주변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돌았다.
세무조사를 받게 된 해당 언론사가 조사팀 주요 인물들에게 기자들을 붙여, 비위 여지는 없는지 여부 등에 대한 '비밀취재'에 들어갔다.
김 국장을 담당하게 된 기자는 그의 거주지 등 주변을 맴돌며 세세한 것 하나까지 파헤쳤지만 터럭 하나 나오지 않자 취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직서를 제출한 뒤 집무실에서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정말 많이 고민했고, 여러 번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다.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고 후배들에게 마지막에 좋은 모습을 보이는 선배로 남고 싶었다."
"국세청에 근무하면서 선후배들로부터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가끔은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한번도 세무대학 출신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긍지로 삼고 살았다. 후배들이 내가 걷지 못한 길을 성공적으로 걸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국세청은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비록 몸은 국세청을 떠나지만, 국세청과 국세청 후배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계속 간직할 것이다."
□ 김영기 국세청 조사국장…
▲1956년 ▲경북 구미 ▲세무대(1기)-방송통신대-중앙대 행정대학원 ▲8급특채
▲재무부 세제실 조세정책과, 울산세무서 법인세과장, 중부세무서 직세과장, 서울국세청 조사1국, 국세청 직원고충담당관, 제주세무서장, 국세청 국제세원정보 태스크포스팀장, 국세청 조사2과장, 부천세무서장, 국세청 통계기획팀장, 국세청 납세자보호과장, 국세청 법인세과장, 국세청 운영지원과장, 중부국세청 조사1국장, 서울국세청 조사1국장, 국세청 자산과세국장, 국세청 조사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