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신세대 영가는 평소 즐기던 와인을 찾기도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 문화 역시 마찬가지이며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은 술 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원래 우리의 전통적인 술 문화는 '건배'였다. 마를 건(乾)에서 알 수 있듯이 술잔을 비운다는 뜻이다. 세월에 따라 겉모습을 바꿔온 건배 문화의 절정은 폭탄주가 아닐까 한다.
언젠가 내게 "이젠 폭탄주도 IT"라고 말한 한 사업가의 재치가 잊히지 않는다. 해설은 더욱 걸작이다. 예전에는 한국에 온 외국 바이어들이 우리가 폭탄주를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는 야만스러운 술 문화라며 맹비난했다. 하지만 얼마 전 외국에 나가보니 위생상 술잔을 돌리지 않는 것만 빼고는 외국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술이란 어차피 일상의 시름을 잊고 취하라고 먹는 것인데 외국인들에게도 스피드 시대에 빨리 취해버리는 폭탄주가 적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직접 제조하는 과정이 일종의 이벤트가 되어 상대방과 빨리 친해진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술자리의 외국인은 한국이 IT만 수출하는 게 아니라 이제 폭탄주도 수출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는 것이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영가들의 술 문화도 생전의 삶에 따라 제각각이다. 기존 건배 문화를 따르는 농촌 출신의 영가라면 막걸리를 바가지로 비우던 습관이 남아서 아예 정종 한 병을 벌컥벌컥 다 마셔댄다. 그래서 제상 한 쪽에는 늘 대야만한 술그릇을 미리 준비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술 문화에 일고 있는 변화를 구명시식에서도 확실히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제상에 청주나 막걸리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영가들이 드러내놓고 "술 좀 바꿔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생전 아버님께서 아껴 드시던 술이라며 양주를 챙겨올 때도 있다.
신세대 영가들은 더욱 독특하다. 정종대신 와인을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와인은 영가에 예를 갖춰 올리기가 까다로운 술이다. 어떻게 보면 와인은 우리 전통의 건배 문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신경향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영가가 원하는 것을.
명절날 차례상도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듯이 술 문화 역시 빠르게 변하는 것을 보면 구명시식도 조금은 걱정이 된다. 영가의 연령대가 다양하다보니, 나 또한 영가들의 술 문화에 일일이 맞추려면 와인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할지 모르겠다. 실은 그것보다도 구명시식에서 영가를 위해 진지하게 폭탄주를 만드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질까봐 은근히 걱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