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를 몇 달 남기지 않은 19대 국회가 정쟁(政爭)에 빠져 주요 민생 법안과 안건 처리에 소홀하다는 국민적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야당이 국회선진화법 뒤에 숨어 법안 처리를 미루거나 다른 법안과 연계하는 등의 방법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며 ‘일자리 창출’을 앞세운 여론전으로 정면 돌파 할 기세다.
이에 맞서 야당인 새정치연합은 ‘민생 최우선주의 10대 법안’과 ‘국정화금지법’으로 “민생과 민주주의를 사수하겠다”며 주거불안 해소를 위한 임대주택법 등 민생살리기법과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한 청년고용촉진법 등 경제살리기법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여야가 ‘민생’을 두고 경쟁에 나섰지만 내년 총선전략과 맞물려 ‘배가 산으로 가는’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국민 여러분께서 국회가 진정 민생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나서주시라”며 “앞으로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노동개혁법,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일자리 관련 법안 등이 내년 5월 19대 국회임기가 끝날 때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결국 폐기될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되면) 국민이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회심판론까지 제기하며 법안통과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국회에 제출해 현재 계류 중인 법안은 노동개혁 관련 5법과 경제활성화를 위한 서비스산업관련 4개 법안 등 모두 9개다. 정부는 지난 ‘9·15 노사정 대타협’ 직후 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산재보험법·기간제법·파견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50여일이 지난 현재까지 후속 논의 과제에 대한 합의는 전무한 상태다.
노사정위원회는 엊그제 기간제 사용기간 등 비정규직 핵심쟁점에 대해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고 노사정 및 전문가그룹 각각의 의견을 병기한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공’을 국회로 떠넘겼다.
서비스업 육성·지원을 위해 만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국회에 제출된 지 4년이 다 되도록 국회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호텔을 대폭 확대하는 내용의 관광진흥법 개정안도 지난 2012년 10월 제출된 이후 방치돼 있다.
해외 환자 유치와 의료관광 활성화를 위한 국제의료사업지원법은 작년 10월 이후 1년 1개월 동안 상임위에 계류돼 있고, 원격의료 도입을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1년 7개월 넘게 상정조차 되지 못한 상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의 분석에 따르면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통과되면 서비스업투자와 생산성 증가로 2030년까지 서비스업에서 신규일자리가 최대 69만개의 일자리가 생길 수 있고, 관광진흥법 개정안은 1만7000개, 국제의료사업지원법과 의료법 개정안은 9만 4000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기대된다고 한다.
한·중 FTA 비준동의안은 지난 6월초 국회에 제출됐지만 소관 상임위인 국회외교통상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비준안이 처리되면 관세혜택으로 대중교역이 연 90억 달러 증가하고 일자리 5만개가 창출된다고 정부는 주장하지만 야당은 피해산업 지원과 불법어로 및 황사 등 환경문제에 대한 보완책을 내세워 비준을 늦추고 있다.
야당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의료 민영화’로 연결돼 보건·의료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크고, ‘의료법 개정안’ 역시 의료민영화 위험성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에 관광숙박시설 건립을 허용하는 ‘관광진흥법’도 대한항공이 경복궁 옆 호텔 건립 대신 문화창조융합센터로 계획을 변경했음에도 교육환경의 악화를 우려해 여전 반대하고 있다.
노동개혁에 대해 야당은 ‘재벌개혁’을 더 앞세우고, 노동개혁이 아닌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노동개악’이라며 반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새누리당이 이번 회기 내 반드시 처리를 천명하자 야당은 총력저지로 맞서기로 하는 등 법안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들 민생법안들이 통과되면 일자리창출과 경제활성화에 얼마나 기여할 지는 누구도 예단을 못한다. 야당은 국정운영을 감시하고 정부정책을 견제하는 야당으로서의 입장이 있기 때문에 야당의 반대를 모두 ‘국정발목잡기’로 몰아 칠 수는 없다.
‘경제활성화·노동개혁 9법’ 통과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이들 법안의 국회통과를 위해 야당을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매사를 야당 탓으로 돌리고 국민여론에 호소하는 행태는 150석이 넘는 거대 의석을 가진 여당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박 대통령이 2012년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비대위원장 시절 주도해 만든 법이다.
야당이 법안통과를 막고 있다고들 하지만 또 19대 국회 들어 처리된 법안 수를 보면 이전 국회들과 별 차이가 없다. 대통령이 국회만을 질타할 입장은 아니다. 법안통과를 위해 여야 의원들을 설득시키고 이해와 협조를 끌어내는 정치리더십은 대통령이 발휘할 일이다. 그럼에도 청와대 내에 개혁입법들을 주도할 컨트롤타워조차 보이지 않는다.
야당은 ‘진짜 민생’ 법안으로 전ㆍ월세 상한제 도입, 대기업에 청년고용 의무적 할당, 재벌에 대한 특혜성 비과세 감면혜택 폐기 등을 들고 나왔지만 이 역시 수도권과 젊은층 표심을 의식한 총선카드 냄새가 짙고 정부 여당과의 협상자체도 쉽지 않은 사안들이다.
더욱이 총선을 불과 5개월 앞둔 예민한 시점에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선택을 요구해 선거개입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핵심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사람들이 총선 출마를 위해 속속 자리를 떠나 ‘국정 누수’현상도 빚어진다. ‘당분간 개각은 없다’고 청와대는 제동을 걸었지만 현실적으로 총선에 출마할 장관들에게 민생에 집중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
여야가 각기 선거구 셈법에 골몰하고, 여권내부는 ‘진짜 친박’ 경쟁으로 자중지란 상태다. 대통령이 퇴임 후까지 염두에 두고 내년 총선을 통해 국회 내에 친위(親衛) 세력을 구축하려 한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말로는 ‘민생 올인’을 내세우지만 물밑에선 임기 이후 밑그림에 골몰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가 어렵다. 정치적 반대자를 몰아붙여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진영논리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선거전략 으로도 읽힌다. 말로만 민생제일주의, 민생은 안중에 없고 민생을 빙자한 ‘나쁜 정치’만 활개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