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광나루역에 나타난 영가
노래에도 영혼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1998년 3월, 모 방송에서 가수 L의 뮤직비디오에 여자 영가가 나타나 당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측에서도 나중에 몇 번이나 영상을 확인했지만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 영가의 목격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비가 올 때면 촬영지인 광나루역에 자주 나타나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 급기야 방송에까지 보도된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숨어있기에 가수 L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일까.
전쟁의 상흔에서 갓 벗어난 젊은이들이 소박한 꿈을 꾸던 1960년대에 그녀는 가수를 꿈꾸며 술집에서 노래를 하던 가수 지망생이었다. 그녀에게는 순정을 다 바쳐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행복한 결말을 보지 못했다.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자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 꽃다운 나이의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는 그 무렵 유행하던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구명시식을 통해 그녀의 한 많은 사연을 알게 된 나는 성심껏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끝으로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던 '마포종점'을 틀어주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생각한들 무엇 하나/궂은비 내리는 종점'이라는 그 노래 가사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녀를 위한 진심어린 선물이었다.
"더 이상 죄 없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내 말에 영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당부를 받아들인 그녀는 좋아하던 노래를 통해 세월에 덧쌓인 한을 모두 날리며 천도되었고, 다시는 광나루역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 뮤직비디오 소동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후일담이 더 있다.
영가의 사연이 알려져 허황된 소동을 마케팅에 이용한다는 억울한 누명을 벗은 가수 L은 그 후에 많은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며 명성을 쌓았다. 공연의 성공은 가수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훌륭한 무대 매너도 한 몫을 했지만 그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꾸준히 그를 돕고 있었다.
댄스 가수의 춤을 보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고 있다. 한바탕 굿을 보는 듯하다. 세계에서 문화와 예술에 정평이 나있는 프랑스 전문가들은 오죽하면 한국의 굿을 예술의 에너지원으로 찬사를 보냈을까.
지난 3월 TV에서 광나루역에 나타난 여자 영가는 과학적 검증을 거쳐 조작이나 합성이 아님이 밝혀졌다. 내가 그 여자 영가에게 마지막으로 틀어줬던 '마포종점'처럼 천도를 하는 사람은 항상 좋은 천도를 해야 한다. 구명시식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마음에 담긴 한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커다란 해원의 한 마당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