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세상에서 가장 귀한 통장
7년 전 이야기다. 한 남자가 나에게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 통장으로 구명시식을 올려주세요.” 그는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구명시식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통장에 들어있는 액수는 크지 않았지만 통장의 사연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는 전에 교도소에 있었다고 한다. 노역을 하면서 받은 일당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그의 어머니는 노쇠한 몸으로 옥바라지를 하셨다. 면회 온 어머니는 별 말없이 건강한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간단한 몇 마디만 물어보시고는 물끄러미 아들 얼굴을 바라보시다 가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차츰 발길이 뜸해지셨다. 건강이 안 좋아진 것이다. 친척들의 부축을 받으셔야 겨우 찾아오곤 하셨다. 그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건강한 자신이 어머니를 찾아뵈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통장을 앞에 두고 신세 한탄을 했다. “저도 열심히 살아보려 했습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사업을 시작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동업자는 도망가고 저도 피해자인데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가 다 뒤집어쓴 꼴이 됐습니다.”
그런데 구명시식 당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우연치고는 너무 기이하게 그를 담당했던 수사관도 구명시식을 올리게 되었다. 공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부인이 큰 병으로 위독한 상태였다. 그는 아이들을 생각해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구명시식을 청했다.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통장의 주인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쓰라린 과거를 다시 떠오르게 한 수사관을 보고 어찌 속마음까지 태연했겠는가. 전직 수사관도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직무에 충실했을 뿐 결코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도.
구명시식이 끝난 뒤, 나는 두 사람을 화해시켜야만 했다. 통장 주인은 맺힌 마음의 응어리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전직 수사관인 그도 자신이 알게 모르게 많은 업을 지은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면서 자식을 법조계로 출세시킬 생각은 깨끗이 접겠다고 했다. 그리고 통장 주인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사람은 좋은 인연을 맺기를 원하지만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연을 맺을 때가 있다. 특히 법을 다루는 사람은 투철한 직업의식 때문에 뜻하지 않게 업을 짓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해도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