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자일은 추모에 대한 보답인가
최근 산악영화 ‘에베레스트’가 개봉되었다. IMAX 3D로 보는 화면은 눈을 즐겁게 했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산악인의 아픔이 가슴으로 전해 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한국원정대가 조난을 당했다가 살아 돌아온 얘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95년 가셔브룸 4봉을 정복하기 위해 준비 중인 한국 원정대의 베이스캠프에 한 낯선 슬로베니아 산악인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슬라브코. 그는 우리 원정대와는 다른 곳으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얼마 후 서벽을 오르는 그의 모습이 저 멀리 한 점으로 보이더니 곧바로 실종되고 말았다. 그를 구하기 위해 슬로베니아 구조팀이 나섰으나, 구조팀마저도 조난을 당했다.
이를 지켜본 한국 원정대는 등반을 중단하고 함께 구조 활동을 벌였다. 앞을 못 볼 정도로 심한 설맹이 걸린 슬로베니아 대원을 고글까지 벗어 씌워주고 무사히 데리고 내려왔다. 하지만 슬라브코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손재주가 있는 한 대원이 초라하지만 동판을 만들어 슬라브코의 추모제를 지내주었다. 그해 우리 원정대는 서벽 중앙립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년 후 1997년. 한국산악회 원정대는 중앙립 돌파에 성공했다. 원정대는 해발 7000m 하산 지점에서 2년 전 실종된 슬라브코가 눈 속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등반대는 시신을 가지고 내려갈 수 없어 유족에게 전하기 위해 그가 가진 자일의 일부 잘라 가방에 넣었다.
원정대는 하산하던 중 큰 위기를 맞았다. 걸쳐놓은 자일의 중간이 곧 끊어질 듯 닳아서 전 대원이 큰 조난을 당할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다. 순간 유품으로 잘라온 슬라브코의 자일이 생각나 그 자일을 꺼내 묶어 대원 모두가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고. 원정대는 하산 후 다시 한 번 그를 위해 추모제를 지냈다. 만약 그때 그 자일이 없었다면 아마 원정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람은 아무런 목적 없이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우리가 하는 작은 행동이 때로는 이처럼 나와 내 주변사람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슬라브코의 자일이, 한국원정대에 대한 결초보은(結草報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대원들 모두에 대한 카르마이며 인연(因緣)이 아닌가 한다. 실종과 시신발견, 자일에 의한 생환,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인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 잔의 물을 엎지르면 우주 전체가 목마르고, 한 송이 꽃을 꺾으면 우주의 일부분이 꺾인다. 선한 마음 하나가 좋은 업을 만들고, 남을 위해 손을 내밀면 내 업이 달라지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네트워크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