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도에 없는 길’도 마다않던 한국경제가 길을 헤매다 깊숙한 늪지대로 빠져들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0일 출입기자단과의 송년간담회에서 “파고를 넘기 위해 지도에 없는 길을 얘기했었는데, 그 뒤 안 해본 게 없다”며 그럼에도 “객관적으로 보면 대내외 여건이 나쁜 상황에서 선방하고 있다”고 자평했다.
작년 7월 취임한 최 부총리는 부동산 대출규제를 풀고 금리를 낮춰 부동산 시장에 반짝 불씨를 지폈다. 추경으로 돈을 풀고, 자동차·가전제품 소비세 인하와 대대적 할인이벤트 등으로 경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들은 일시적 진통제일 뿐 경제를 회생시키는 근본대책은 되지 못했다. 단발성 부양책 남발로 국가 부채 비율은 GDP(국내총생산)의 40%를 넘겼고, 가계부채는 1200조원에 육박했다. 기업부채는 2400조,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좀비기업도 전체기업의 13%에서 15.2%로 증가했다. ‘빚으로 쌓아올린 반짝 경기’라는 비판도 이 때문이다.
올해 2%대 중반에 머문 경제성장률은 내년에도 2%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최 부총리 스스로 세계경제 전체 교역량이 줄어드는 환경을 우리만의 노력으로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내년에도 올해보다 대외여건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아 도전의 한 해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미국의 예고된 금리인상, 게다가 세계 경제에 몰아친 저유가 충격은 에너지 수입국인 우리 경제에 단기적인 무역수지 개선 이득을 안겨주기보다는 신흥국과 선진국의 동반 침체라는 험난한 장애물로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다.
올해 11월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7% 줄어들었다. 수출보다 수입은 더 큰 폭(마이너스 17.6%)으로 줄어 무역수지는 월간 사상 최대흑자를 기록하며 불황형 흑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최대 시장인 중국 수출이 6.8% 감소했고, 미국 수출도 12.4%나 줄었다. 반도체 등 주력 품목의 수출 부진이 이어지고 있어 연말에는 11월보다 수출이 더 줄어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발효로 13억 시장이 활짝 열렸다고 정부는 생색을 내지만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주력수출품들은 정작 저율 관세혜택을 받지 못한다. 농산물 시장 보호에 치중하다 경쟁력 있는 공산품협상에서 너무 밀렸기 때문이다.
중국시장에 파고들려면 관세인하보다 비관세장벽을 건너뛰어야 한다. 한중 FTA는 가장 낮은 단계의 FTA여서 관세인하만으로 대중 수출활성화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은 우선 대내외 금리 차이로 단기적으로 외국인 자금 이탈이, 장기적으로 금리 인상으로 인한 가계부채·기업부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미국 금리인상으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 대미수출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경쟁국인 일본이나 중국 통화도 함께 절하돼 그 효과는 상당부분 상쇄된다. 오히려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신흥국들 경기가 위축돼 신흥국에 대한 수출만 줄어들 우려도 적지 않다.
대외 수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빚에 짓눌린 가계와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줄일 경우 내년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1회성에 그치지 않고 매년 1%포인트씩 3년에 걸쳐 3.5%까지 인상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 심각성을 더 한다.
너무 싼 기름 값이 세계경제를 위기로 내모는 이른바 ‘저유가의 저주’도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원유 생산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산유국들이 벌이고 있는 ‘치킨게임’을 접고 스스로 감산에 나서지 않는 한 저유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과거 저유가는 원유를 전량 수입해야 하는 한국경제에 호재로 인식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국제유가 급락으로 산유국의 국가부도 위험이 높아지고 세계 경제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압력이 커지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도리어 악영향을 받는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과 중국 경기 둔화 등이 맞물리면서 신흥 산유국들의 파산으로 이어질 경우 글로벌 경제위기는 시간문제다.
미국에 이어 영국이 기준금리인상을 저울질하고 있는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이나 중국, 일본 등은 지지부진한 경기를 살리기 위해 추가로 돈을 푸는 것을 검토하는 등 주요 경제대국들의 대응도 엇갈려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고령화·저출산에 따른 잠재성장률의 하락은 피할 길이 없는데다,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계층간 불평등으로 안정적인 총수요 기반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서 경제를 끌어내려면 체질을 바꾸는 구조 개혁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는 가시밭길이다.
하지만 정부는 말로만 개혁을 외칠 뿐 실제 공공부문·금융·교육개혁은 ‘무늬만 개혁’에서 맴돌고 있고 노동개혁은 국회에서 막혀 있는 상태이다. 계류법안들이 통과되어도 경제회생효과가 의문시되는데도 대통령은 법안만 통과되면 경제가 살판이라도 나는 양 국회에 모든 책임을 미루며 여론전만 펴고 있다.
지난 5월 메르스사태로 내수가 가라앉자 정부는 대규모 추경을 비롯해 개별소비세인하 임시공휴일지정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등 쓸 수 있는 카드는 총동원했다. 총력전을 펼치고도 올해 성장률이 당초 예상(3.8%)에 훨씬 못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이 더 힘들어 보이는 것은 추가로 쓸 수 있는 부양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정책 여력이 소진돼 경기부양보다는 잠재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지만 이는 인내와 긴 시간을 요한다.
우리 경제가 급속하게 저성장기조로 진입하면서 소득은 물론 국민들 경제심리도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고용이 늘어나고 있다지만 단기, 또는 비정규직, 고령층 근로자 위주로 늘어나면서 소득개선효과는 미미하다.
늘어난 빚에 원리금상환부담이 커져 소비여력이 잠식되고 해외소비가 국내소비보다 빠르게 늘어나면서 국내소비와 소득은 더욱 위축되고 있다. 기업들에게서 기업가 정신이 사라지고, 근로자들에게서 헝그리 정신이 사라진지 오래다.
원천기술이 없고, 단일품목의 시장지배력이 높아져도 이익이 줄어들고, 핵심부품은 여전 일본에 의존하고, 규모의 투자에서는 중국의 국가자본동원력을 따라갈 수가 없는 이른바 ‘4대 장벽’에 한국경제가 갇힌 지 오래다.
근본적인 개혁과 체질개선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가야 할 때인데도 ‘법안처리의 정치’에 매몰돼 또 한 해를 흘려보내는 정부와 여야 정치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심판한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