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몸살을 앓던 IMF 경제위기 때 내가 알고 지내던 은행원도 직장을 잃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은행이 망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경기, 동남, 대동, 동화, 충청은행 등이 IMF직후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그 후로도 구조조정과정에서 보람, 서울, 주택, 장기신용, 상업, 주택, 조흥은행 등이 사라지고 말았다.
은행원 친구는 구조조정을 당한 뒤 자살하려고 바닷가까지 갔다가 다시 삶의 의지를 다지고 돌아와 어느 외국계 생보사에 설계사로 취직했다.
종신보험이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이 보험은 종신토록 보장하는 초장기의 상품으로 예정사업비를 많이 부가할 수 있어서 모집수당이 다른 상품보다 몇 배나 많았다. 이 때문에 설계사들에게는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그는 은행원 시절 여신담당 부서에서 근무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살려 엔화표시 대출에 나서기로 했다. 원화의 가치는 많이 낮아져 있었고 금리도 높았다. 반면 엔화는 고평가되어 있었고 잃어버린 10년을 맞았던 일본은 거의 제로금리 수준이었다.
영업전략은 단순했다.
외화대출을 받을 수 있는 의사나 중소기업을 찾아가 엔화대출을 권하는 것이다. 당시 원화의 대출금리는 10%를 넘고 있었는데 엔화 대출금리는 2% 수준이었다. 고객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향후 원화가치가 올라가면 대출원금도 줄어들고 아파트나 땅과 같은 부동산에 투자하여 값이 오르게 되면 1석 3조의 효과가 있다는 그의 설명에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신청했다. 물론 이자 차이로 종신보험에 가입하라는 권유는 빼먹지 않았다.
그 후 몇 년간 이 시나리오는 그럴듯하게 들어맞아 고객들로부터 큰 돈을 벌게 해줬다며 최고의 설계사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 친구는 빚도 갚고 많은 돈을 벌어 외제차도 타고 도 의원 선거에도 나가는 ‘출세’를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뒤늦게 그 친구의 성공스토리를 들은 설계사들이 그의 영업패턴을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시장은 그 시나리오와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또 다시 원화약세가 이어졌고 부동산시장은 빈사상태에 빠졌다.
대출원금은 거의 배로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원경영도 과당경쟁에 따라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불경기로 중소기업들도 경영이 어려워졌다.
아파트와 토지 등이 경매로 넘어가거나 헐값에 팔려 나가고 보험계약은 해지됐고
엔화대출을 권장했던 설계사들은 졸지에 사기꾼으로 몰려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영국의 보험영업 격언에 “최고의 설계사는 고객의 이익을 증진시켜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조언하느냐에 따라 사기꾼이 될 수도 있고 훌륭한 설계사가 될 수도 있다.
결국 훌륭한 설계사가 되기 위해서는 남의 뒤를 따라 다녀선 안 되고 시장을 보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이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