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제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후보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등의 건의로 경제민주화를 공약사항으로 내걸었다.
이에 가세해 새누리당 전·현직 국회의원 48명도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을 만들어 입법을 추진,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내용을 일사천리로 처리할듯한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입법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입장을 보이며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의 내용과 국회처리 기한의 조율에 들어갔다. 한 때 국민들의 관심을 송두리째 뺏아갈 정도로 요란했던 법안도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희석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회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기업들의 회계 투명성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정부가 나서서 회계투명성을 위한 제반조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세월이 어느정도 흐르자 기업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 있는 회계 내역을 감추려하는데 골몰했고 정부 또한 이를 눈감아주려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기업들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특수관계자 매출· 매입의 세부 내역은 지난 2010년 IFRS(국제회계기준) 도입과 함께 회계감사보고서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특수관계자와의 매출· 매입은 기업이 자회사나 오너와 특수관계에 놓여진 회사와의 거래내역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기업들의 복잡한 지배구조를 분석해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어 투자자 뿐만 아니라 세무당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항목이다.
신세계의 경우 2009년 감사보고서에서 별도회계기준으로 특수관계자인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 스타벅스코리아 등 15개 회사로부터 매입 4918억원, 매출 967억원의 거래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2010년 감사보고서에는 별도회계기준으로 덩그러니 매출 6299억원, 매입 1519억원이라는 합계액만 나타나 있다.
◆…2009년 신세계 감사보고서 중 특수관계자 매출 내역. 출처 : 금융감독원
◆…2010년 신세계 감사보고서 중 특수관계자 매출 내역. 출처 : 금융감독원
■ 모든 기업 감사보고서에서 특수관계자 매출 내역 사라져…감독기관은 방조
2010년부터 감사보고서에서 특수관계자 매출· 매입 내역이 사라진 것은 신세계에만 그치지 않는다. 삼성전자도 특수관계자 매출· 매입 내역이 감사보고서에서 송두리째 보이지 않게 됐다. 현대자동차는 다음해부터 특수관계자 매출· 매입 내역을 빼고 공시했다.
삼성전자는 2009년 감사보고서에서 별도회계기준으로 에스엘시디, 삼성SDI, 삼성에스디에스, 삼성전기 등 특수관계자 25개사와의 중요한 영업상 거래비용으로 매출76조 6521억원, 매입 46조 2571억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2010년 감사보고서에는 특수관계자 거래내역 항목에서 회사와의 개별 거래내역을 밝히지 않고 종속회사와의 거래가 △매출 100조 9341억원 △매입 48조 6449억원, 관계회사와의 거래가 △매출 5305억원 △매입 3조2323억원이라는 합계만 내놓았다.
현대자동차는 2009년 감사보고서에서 별도회계기준으로 특수관계자인 글로비스, 이노션, 현대엠코, 삼우, 일진베어링 등 51개사와의 거래가 매출 10조 4838억원, 매입 8조 4억원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현대자동차는 2010년도 감사보고서에서 특수관계자와의 거래내역을 전년도와 동일한 방법으로 상세히 밝히면서 매출 10조 2927억원, 매입 7조 9586억원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2011년도 감사보고서부터 회사와 특수관계자 및 대규모기업집단의 계열회사와의 중요한 거래내용의 회사별 거래내역을 밝히지 않고 합계만을 내놓았다. 2012년도 감사보고서에도 특수관계자인 회사별 거래내역은 사라졌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2010년도 감사보고서부터 특수관계자인 회사와의 거래 내역을 게재하지 않고 합계만을 내놓았고 2011년도 2012년도 감사보고서부터는 특수관계자와의 회사별 상세 거래내역은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됐다.
2010년도 감사보고서부터 IFRS가 본격 적용됐다. 기업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도입한 IFRS의 적용을 계기로 특수관계자 거래내역이 감사보고서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수관계자와의 거래내역 보고 방식을 변경하겠다는 정부 발표도 없었다.
감사보고서 가운데 자회사나 오너와 특수관계에 놓인 회사들과의 거래 내역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한 특수관계자 거래 내역은 기업으로서는 가장 가리고 싶어하는 항목이기도 하다.
기업들은 특수관계자인 회사와의 거래내역을 감추게 됨으로써 '손톱 밑의 가시'를 뽑아낸 셈이지만 투자자들은 앉아서 '눈먼 장님'이 된 꼴이다.
세무당국 또한 기업들의 세금을 추징하는 과정에서 특수관계자 거래내역을 일일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게 됐고 이는 결국 국민의 세금을 헛되이 낭비하는 꼴이 됐다.
금융당국이 기업들의 치부를 가려준다고 해서 반드시 기업들에게 이득을 가져다 준다고 장담할 수 없다. 투자자들이 기업들의 재무제표와 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를 믿지 못한다면 자본시장에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회계 정책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기업들의 치부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의 반발이 예상되지만 금융당국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음을 더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