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어느 국악 전공자의 전생
현생의 모습은 전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전생의 카르마를 현생에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전통 문화를 지키는 가장 큰 역할을 한 분들이 기생이라 생각한다. 시화와 가무에 능한 종합 예술인으로 당대를 풍미한 기생만 해도 여럿.
서화담 선생과의 밀고 당기는 사랑으로 유명한 개성 기생 황진이, 전북 부안 출생으로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아름다운 시조의 주인공 매창의 전설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일까. 전생에 유명했던 기생들은 다시 태어나 못다 이루었던 예술의 혼을 불태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를 찾아왔던 국악 전공의 여대생 역시 그러했다. 유달리 하얀 피부에 가냘픈 몸매를 갖고 있던 그녀는 목소리 또한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전생에 국악인이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유명한 전주 기생이었다.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세도가의 양반들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줄을 섰을 정도. 작은 얼굴에 하얀 얼굴, 또렷하면서도 은은한 눈동자는 한번만 바라봐도 넋을 잃었다.
미모만 아니었다. 그녀가 뜯는 가야금 소리는 담장 너머 남정네들의 발길을 유혹했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야금과 함께 평생을 음악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
그러나 기생의 운명을 어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던가. 가야금만 켜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기생 또한 여자. 그녀에게 유독 적극적이었던 전주 최고 갑부의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의 두 번째 아내로 들어가게 된다.
생활은 넉넉했지만, 가야금은 쉽게 켤 수 없었다. 가야금으로 최고의 명인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꿈은 이렇게 좌절됐고, 이것이 한이 되어 환생한 뒤 여지없이 국악인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학생은 분명 한국 최고의 국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생에서 좌절된 꿈을 반드시 이뤄보십시오. 특히 전생처럼 남자 때문에 음악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어느 새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대생은 한참 뒤에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가슴속 응어리가 탁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술의 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생을 거쳐 그 길을 위한 강력한 염원을 품고 있어야 그 카르마가 현생으로 넘어와 이뤄질 수 있다. 현생에서는 가야금 대신 해금을 연주하고 있는 그녀. 지금도 그녀가 연주하던 아련한 해금소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