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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근 칼럼]

美 약(弱)달러공세에 '잃어버린 20년' 될 수도

조세일보 / 변상근 논설고문 | 2018.04.04 08:30

무역적자 줄이기에 나선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공세가 신(新)환율 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대미 흑자국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해 막대한 무역흑자를 챙기고 환율조작을 통해 미국 돈을 빼앗아 간다며 환율을 무역협상 무기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달러화는 변동 화폐이고 그 가치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재무부는 달러가치에 대해 '강한 달러는 미국의 강한 경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보여 왔다. 강(强)달러는 미국경제에 대한 자신감이자 미국인의 긍지였다.

느닷없이 포문을 연 건 스티븐 므누신 현 재무장관이다. 그는 지난 2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달러약세를 환영한다”며 “약(弱)달러는 무역과 기회 측면에서 확실히 미국에 좋다”고 내놓고 공언했다. 미국이 수출을 늘리기 위해 약달러를 의도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다.

실제 달러 값은 트럼프대통령이 취임한 2017년 한 해 10% 가까이 떨어졌다. 2003년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률이다. 올해 들어서만 3.7%가 떨어져 주요 통화들에 대한 달러가치는 3년여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새 수장을 맞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어렵사리 기준금리를 올려도 달러는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금리 인상은 달러 강세요인이라는 게 정설이 아닌가.

강대국이 치사하게 통화약세화를 노린다는 비판이 나오자 트럼프대통령은 “미국이 다시 경제적으로 강력해지고 있어 달러는 앞으로 점점 더 강해질 것”, “궁극적으로 강한 달러를 보고 싶다”고 능청을 떨었다. 강(强)달러를 선호하는 발언 같지만 대선후보 시절부터 약달러를 공공연히 옹호해왔다는 점에서 액면그대로 믿는 이는 드물다. 

앞으로 달러가 강해질 것이라는 그의 말은 '경제가 좋아지면 결과적으로 통화가치도 올라 간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둘러대기다. 미국 행정부는 무역협정 재협상 압박과 더불어 중장기적인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이미 용의주도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환율에 집착하는 이유는 관세폭탄 보다 파괴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관세는 철강 자동차 등 특정 품목에만 적용되지만, 환율은 모든 수출·수입물품에 일괄적으로 적용된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인데다 전 세계 금융시장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어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데 이 이상의 효율적인 무기도 없다.

달러 약세는 트럼프가 추진하는 미국 제조업 부활에도 도움이 된다. 약달러를 이용하면 유로화의 상대적 강세를 통해 대규모 대미 무역흑자를 내는 독일도 견제할 수 있다. 트럼프의 절대 지지세력인 쇠락한 자동차 공업지대, 즉 러스트 벨트를 달랠 수도 있다. 

환율압박 대상 제1순위 국가는 중국, 그리고 한국이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시절부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누누이 약속해온 터다. 미국 무역적자의 절반이 중국과의 무역역조에서 비롯돼 위안화 평가절상은 트럼프의 최우선과제의 하나다.

최근 관세보복 등 미·중간 무역마찰 와중에 위안화 가치가 연일 뛰어올라 2년 반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 의지가 반영되는 중국 환율제도 특성상 위안화 가치를 시진핑 정부가 올려 고시하는 것은 트럼프의 환율대공세에 대비한 중국의 선제대응으로 읽힌다.

금리인상기에 수출경쟁력을 확보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대미 흑자국들에게 제2의 플라자합의 같은 특단의 환율합의를 밀어붙이고 있지 않느냐는 관측도 꼬리를 문다.

플라자합의는 1985년 쌍둥이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읍소와 은근한 협박으로 흑자국 일본 엔화가치를 대폭 높인 환율합의다. 합의 당시 일본 엔화는 달러당 240엔이었으나 1년 뒤 150엔, 1987년 말에는 120엔까지 가치가 급등했다.

일본은 미국부동산을 대거 사들이는 등 한동안 엔고의 축복을 누렸지만 폭등한 부동산과 주식 등의 거품이 꺼지면서 엔고가 재앙이 돼 '잃어버린 20년'의 밑자락을 깔았다.

트럼프대통령이 미국우선을 내세우며 통상과 안보를 연계하고, 환율까지 협상하러들자 일본, 유럽연합(EU), 캐나다 등 미국과 무역규모가 크거나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국가들도 '플라자의 악몽'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하는 상황이다.

한국에도 올 것이 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안 협의과정에서 미국과 맺었다는 환율개입 억제 관련 양해각서(MOU)가 그것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무역과 투자의 공평한 경쟁의 장을 촉진하기 위해 경쟁적 평가절하와 환율조작을 금지하는 확고한 조항에 대한 합의가 마무리되고 있다”며 “철강과 외환, FTA 세 분야에서 타결된 한국과의 협상은 역사적으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 정부는 “한·미 FTA 개정 협상과 환율 협의는 별개”라며 “환율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합의도 없었다”고 적극 반박했다. 하지만 '불공정한 통화관행'을 부각시키며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기정사실화한 대목은 되돌리기가 어렵다.  양자협상에서 환율문제를 양해각서 등으로 공식문서화한 사례는 찾기 어렵고 '환율주권'차원에서도 어림없는 얘기다. 플라자합의의 경우 일본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G5 재무장관과 담소를 나누며 '미 달러화 가치를 내릴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고 대외불균형 축소를 위해 재정·통화 정책을 공조한다'는 두 줄짜리 성명에 서명한 것이 전부였다.

기획재정부는 이달 발표될 미 재무부의 환율보고서에 환율조작국 지정을 피하기 위해 외환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미국 및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 중이며 우리 환율정책의 투명성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면 될 일이라고 태연해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국제통상질서와 외환정책은 규범주도의 다자체제로 굴러간다. 문제는 트럼프행정부 들어 이것이 힘의 논리가 주도하는 양자체제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막강한 국력으로 개별상대국에 압력을 가해 자신들의 이익을 양자구도로 관철시키는 고약한 각개격파 전법이다. 약한 나라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불공정 파워게임이다. 

사실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는 나라전체로 저축보다 소비가 많은데다 제조업의 낮은 경쟁력과 만성적 재정적자가 그 주범이다. 이를 외국 탓으로 돌리고 달러약세화로 어려움을 모면해보려는 것은 그야말로 하책이다. 

달러약세화는 곧 원화가치 절상이다. '환율합의'로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에 영향 받아 이달 들어 달러당 1060원대마저 뚫렸다. 국내 기업의 손익분기점 평균 환율은 달러당 1045원, 현 환율수준이 이미 적정 환율을 밑돌고 있다는 얘기다.

만에 하나 미국과의 환율개입금지협약이 현실화될 경우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을 우리가 답습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환율안정화 전략과 함께 기업의 환위험 관리 등 중장기적인 대비가 절실하다.
 
          


변상근 논설고문

[약력]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한양대 겸임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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