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정삼각형 가족'을 펴낸 나문석 시인.
시인 나문석(57)은 형형한 눈빛으로 시를 쓴다. 순도와 밀도가 높은 기운이 서려 있는 눈빛.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관통하는 시적 통찰력은 거기서 나온다. 그 눈빛 앞에선 어설픈 낭만이나 설익은 그리움이 똬리를 틀 여지가 없다. 어떤 수상한 음모도 꼬리를 내려야만 한다.
그의 시어가 때로는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모난 모습을 보인다거나 다수의 행간에서 신음과 비명이 묻어나는 것은 자신의 눈빛에 정직하려는 시적 태도가 반영된 흔적이다. 시인의 눈빛에는 한 시대의 거친 풍파와 비열한 폭력에 온몸으로 맞선 아픈 개인사가 눈 부릅뜨고 있다.
'영원한 문학 청년' 나문석(사진)이 첫 시집 '정삼각형 가족'(시와에세이)을 펴냈다. 지난 2009년 계간 문예지 '시에'를 통해 등단한 이후 5년 만의 결실이다. 고교 시절부터 최근까지 쓴 작품 중에서 주옥 같은 55편을 골랐다. 시집은 1974년 시인의 부친이 소위 '인혁당 사건'(의문사진상규명위에 의해 조작극으로 밝혀졌으며 2007년 무죄 판결 내려짐)에 연루됨으로써 비롯된 파편화된 가족사가 주조를 이룬다.
원기둥 안으로/ 차가운 물방울들이 쏟아졌다/ 살을 가르는 물방울의 원 구슬 속에서/ 푸른 이끼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그 냄새가 집 밖으로 퍼지는 것이/ 싫다고, 대문을 닫아걸었다/ 사각형 커다란 철문이/ 철거덕 쇠 닫히는 소리를 내며 땅 위에 우뚝 섰다/ 그 해부터 골목 주위를/ 반구형 투구를 쓴 사내들이 서성거리고…('아버지의 우물' 부분)
절대 권력의 감시망 속에서 시인의 가족은 '혈관을 돌아다니는 물방울무늬의 슬픔'을 토해냈으며 '겨우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삼각형'이 됐다. 어느 한 변만 무너져도 가족 전부가 쓰러지고야마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야만 했다. '정삼각형 가족'은 당시의 절체절명 상황을 이렇게 노래한다.
삼각형의 두 변이 잠들었다
꼭지점을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식구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각형 싱크대 모서리에서는
해물탕이 반구형 소문을 터뜨리며 끓어오르고
간간이 인터넷 라디오가
광장에 모인 사람들 구호소리 흘렸다
구름이 아주 짙게 낀 하늘
온갖 도형들이 모여든 육면체 어항에서
형광빛 받은 이끼들
푸른 한숨을 토해내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다면체의 키싱피쉬들이 수없이 입맞춤을 나눴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때 이른 장마에
시달릴 것 같다는 생각이
어두운 하늘을 나는 별소리처럼 들렸다
순간 수족관 수면 출렁이며
삼각형 한 변이 불쑥 일어나서 기울어지고
아파트 꼭대기에 걸린 둥근 달이
낡은 가족사진의 액자 뒤로 넘어갔다
- '정삼각형 가족' 전문
감옥에서 나와 집에 머물던 시인의 부친은 몇 년 전 한맺힌 세상의 끈을 놓았다. 가족을 돌보느라 수십 년 인고의 세월을 보낸 어머니는 그로 인한 충격으로 치매에 걸렸다. 남편의 타계를 아직 모르는 어머니는 지금도 '글썽한 눈물 찍어내며/ 이 엄동설한에 너거 아부지는 잘 계시는가 모르겠다…야야, 우리 시방 어데 가는 길이고?'('어머니와 네비게이션') 묻곤 해 시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시인은 언제까지 그 아픔을 되새김질하며 살기에는 부질없다고 토로한다. 이쯤에서 그 무게의 짐을 내려놓으려 한다. 소통되지 않는 사회라도 그 구성원의 일원으로 주어진 삶의 현실에 적응하고자 한다.
우기의 여름 숲
정적 깊은 날
항로를 잃어버린 나라는
여전히
거꾸로 가는 역사를 쓰고
파종을 해도
새 살이 돋아나지 않는
내 삶의 부질없는 씨앗들
당신이 그토록 아파하고도
버리지 못한 기록들 앞에서
-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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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함을 비우며' 전문
늦은 나이에 제도권 문단에 발을 내딛고 마침내 첫 시집까지 선보인 시인은 "지금 이 길까지 오래 에둘러 왔다. 급할 게 없었으므로 천천히 걸었다. 궁핍했으므로 아름다웠다"고 고백한다. 1975년 대구 고교생들이 결성한 '오구문학' 동인 시절부터 그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경호 시인은 "그의 열아홉 그 형형한 눈빛과 우수에 깃든 표정을 지금껏 잊을 수 없다"면서 "이 시집으로 인해 그의 시가 더 둥글고 빛나는 높이의 경지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