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군주는 질책하는 용단이 필요
10여 년 전 한 독일인 소장가가 갖고 있던 수원 화성 엽서사진을 입수했다. 1900년대 사진 속 수원 화성은 인근 논밭과 초가집을 배경으로 구한말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의 원대한 꿈을 간직한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버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는 이곳에서 제2의 조선을 설계했다. 아버지 장헌세자를 최고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이장한 뒤 수도를 아예 이곳으로 천도하기 위해 신도시 건설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정약용을 불러 화성 축조를 명령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수원 화성 공사현장을 보고받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허망하게 무너진다. 그가 마흔 아홉이 되던 해 고질병이었던 부스럼으로 자리에 눕게 됐다. 새벽마다 활을 쏠 정도로 건장한 체질이었기에 곧 쾌차하리라 믿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정순왕후가 병문안을 다녀온 직후 급서하고 만 것이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지만 언젠가 수원 화성을 거닐다 이곳에 깃든 정조 대왕의 넋과 마주한 적이 있다. 미륵반사가유상이 선덕여왕의 미소라는 것을 알아냈을 때처럼 시간을 거슬러 정조를 영적으로 인터뷰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는 수원 화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수원 화성을 예찬하던 대왕의 얼굴이 어느 순간 깊은 후회로 일그러졌다.
그는 매우 특별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뛰어난 독심술을 갖고 있었으며, 하늘의 천리를 익혀 앞날을 예견하는 눈도 예리했다. 마치 고조선의 단군과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왕이면서 영능력을 갖춘 제사장처럼 근엄하고 영험한 분이었다.
자신은 정이 많은 사람이며 어렸을 때부터 외롭게 성장해 한 번 믿었던 사람을 잘 쳐내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때릴 것이면 용서하지 말고 용서할 것이면 때리지 말라." 즉 자신은 때리기 싫어 너무 많은 용서를 했다며 ‘군주에게 용서는 미덕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조대왕은 아끼던 신하를 잃지 않기 위해 용서하고 또 용서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용서는 단 한 번이면 된다. 두 번의 용서는 용서가 아닌 실수다.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아무리 오랫동안 정을 쌓은 사이라도 용서에는 한계가 있다며 내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가신을 쳐내는 군주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러나 큰 뜻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미덕은 희생하고 가신을 멀리하고 따끔하게 질책하는 용단이 필요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