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먼저 주고 준 것은 즉시 잊어라
2003년 8월 14일. 미국 뉴욕은 거대한 정전사태를 맞는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 순식간에 암흑천지로 바뀌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하철과 열차가 정지하고, 브루클린 다리는 뉴욕을 빠져나가려는 차와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뉴욕의 정전은 단순한 정전을 넘어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믿으려고 노력했고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밤이 오자 예상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슈퍼마켓·상점 등 가게가 약탈당하고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가 빗발쳤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악하게 태어났을까. 성선설과 성악설을 두고 오랜 세월 말을 하고 있지만 답을 쉽게 내릴 수는 없다. 인간은 착함의 DNA와 악함의 DNA 둘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카르마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카르마는 셀 수 없이 많은 탄생의 역사에 기원하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 짓기 어렵다.
기원전 44년, 로마제국의 줄리어스 시이저는 자신이 자식같이 아끼던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시이저는 브루투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워낙 배짱이 두둑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라 적이 많았던 시이저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하지만 브루투스는 항간에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감싸주었다. 그런 브루투스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때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죽하면 ‘브루투스 너마저’란 말이 유언이 됐겠는가.
나를 만나러 오는 많은 사람이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인한 우울증을 치료받고 있었다. 사연은 다양했지만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배신’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어도 그 사람만은 내 편인 줄 알았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을 그렇게 믿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신과 구설수였다.
이쯤 되면 사람의 본성을 의심할 만도 하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란 말을 나는 수없이 들었다. 그 중에는 보답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다.
잘 되면 오히려 나와의 인연을 부정하는 경우까지 있다.
나는 이런 분들을 만나면 생활의 신조처럼 여겨온 말을 되새긴다. “먼저 줘라, 항상 줘라, 빈 곳에 줘라. 그리고 준 것을 잊어버려라.”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을 잊지 않으면 상대에게 섭섭한 마음이 커진다. 베푼 즉시 잊어버리면 마음도 가볍고 상대에 대한 원망도 사그라진다. 인간은 누구나 배신의 DNA를 갖고 있다. 선(善)과 악(惡)을 두고 고민하지 말고‘주는 즉시 잊어버린다.’면 설령 배신을 당하더라도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