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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상속설계 이야기-(18)]

명문가의 역사를 만드는 일

조세일보 / 최재천 변호사 | 2018.06.12 14:04

한때 어느 재벌 기업까지 욕심냈던 정육점이 있다. 1940년에 창업해 3대째 잇고 있는 종로구 팔판길 19 '팔판정육점'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졌던 창업자는 아들에게 가게를 거저 물려주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가게를 사기로 한 게 1974년 7월 4일이에요. 저장된 고깃값은 다 드리고, 가게 시세는 절반으로 쳐서 샀어요"

모두 처가에서 빌린 돈이었다. 그 빚을 갚아야 했다.

"7월에 가게 인수하고 하루도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어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한 시간 반밖에 못 잡니다. 고기는 트럭으로 밤에 들어와요. 그때부터 일하는 거요"

창업자의 손자가 가업에 합류한 건 2011년. 그는 미국에서 MBA를 하고, 경제학을 부전공했던 엘리트였다.

그를 가게로 불러들인 건 정육점의 현 주인이자 아버지였다. 현재 팔판정육점의 주요 거래처는 열두 곳 정도.

그중에서 우래옥과 하동관은 개업 이후부터 70년 고객이다(박찬일, 《노포의 장사법》).

그렇다면 이 집은 무엇을 잇고 있을까.

"장사는 눈앞의 이익을 보면 안 돼요. 크게 보는 거예요"

명문가는 그저 문벌이나, 재벌이나, 정치하는 집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늘 강조하지만 물려주고, 물려받을 것은 재산만이 아니다. 때론 무형자산이 더 아름답다.

예를 들어 가문이나 가족의 가치와 철학, 삶에 대한 태도, 장인정신, 비즈니스 마인드 등. 이런 가족적 가치, 사회적 가치들이야말로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불변의 상속자산이다.

손에 잡히는 가업의 승계도 중요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가업승계, 무형의 가산(家産)승계야말로 본래적 의미의 상속에 더 가깝다.

옛글도 알고 있었다. 다음은《석시현문》의 한 대목이다.

"재산을 쌓아 자손에게 남겨준다고 해도 자손이 이를 다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책을 쌓아 이를 자손에게 넘겨준다고 해도 자손이 이를 꼭 읽어내는 것도 아니다(積産遺子孫, 子孫未必守; 積書遺子孫, 子孫未必讀.)"

상속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가문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명문가를 형성해가는 한 집안의 역사다. 그래서 상속설계의 대상에는 보학(譜學)이 포함된다. 족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족보를 읽을 수 있겠는가. 수십 권의 족보를 정리해서 가족의 역사로 만들 필요가 있다. 간략화하는 것이다.

한글세대에 맞게 한글화할 필요도 있다. 그렇게 해서 가족의 역사, 가문의 역사를 정리해서 남기는 일이다. 그랬을 때 모델이 될만한 명문가의 이야기가 있다.

ㄱ

◆…조지훈 선생의 생가 호은종택(壺隱宗宅) (출처 문화재청)

'청록파'로 유명한 경북 영양 조지훈 선생의 생가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다. 바로 삼불차(三不借)다.

삼불차란 "세 가지를 불차한다. 즉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로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리지 않고,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사람을 빌리지 않고(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셋째는 문불차(文不借)로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이다(조용헌,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그래서 조지훈 선생의 꼿꼿함이 있었을까. 이런 가훈, 이런 가문의 정신이 일관되게 전승되고 있다면 이런 집안이야말로 명문 가문이고, 상속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여의도에서 일할 때, 서예인들을 모시고 동료 의원들에게 가훈을 써주는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가훈은 있되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한 의원도 있었고, 문장은 있되 작품으로 만들어두지 않은 의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랐던 건 가훈 자체가 아예 없어서 비로소 서예계 원로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훈을 정리하는 분들이 있었다. 집안의 훈육은 존재하되 이를 압축해서 정리해볼 여유를 미처 갖지 못했던 것이다.

상속설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가훈을 정리하자. 가족사를 정리하자. 족보를 정리하자. 어떤 정신을 계승시킬 것인가를 정리하자.

그렇게 해서 명문가의 역사를 만들어나가자.


최재천 변호사

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현)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원회 의장 (전)
17대, 19대 국회의원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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